입영영장을 받아 군에 가는 날이 온통 눈물바다였던 시절도 있었다.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아들의 손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꽁보리밥에 배추국과 단무지를 먹던 군대시절이었으니 보내는 가족들 마음이 오죽했으랴 싶다. 군대생활이라면 으레 춥고 배고프고 구타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소풍가는 기분으로 간다는 지금의 입영 풍속도와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든다. 이런 생활 속에서 그나마의 위안이라면 저녁 잠자리의 모포였다. 매일매일의 고된 훈련과 군기 센 일석점호 속에서 자기만의 편안한 시간은 모포 속이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장정들이 부모생각 고향생각으로 그리움이 북받칠 때 모포는 손수건 대용이었고,뒤집어 쓰고 누운 모포 속은 유일한 자기만의 공간이었다. 이는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군용 모포는 50∼60년대에는 비정상적인 경로로 흘러나와 가정에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입성이 변변치 않았던 탓에 젊은이들의 '겨울외투'감이 되기도 했고,때로는 여자들의 방한 옷감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다리미질의 깔판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육군은 병사들이 창군이래 50여년간 덮고 자던 모포를 바꾼다는 소식이다. 1백% 폴리에스터를 소재로 한 신형 모포는 기존 모포보다 보온성이 향상되고 무게가 가볍다고 한다. 우리 군은 48년 창군되면서 미국이 원조한 모포를 사용해 오다 72년부터는 같은 원단의 국산으로 대체했었다. 모포의 재질도 초창기에는 면과 아크릴이었으나,70년대부터는 면 대신 모(毛)를 섞어 보온성을 높였다. 지난 82년 포클랜드 전쟁때 모포에 불이 붙어 아크릴에서 나온 유독가스로 인해 인명사고가 크게 난 후로는 모의 비율이 높아졌다. 군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지만…"을 목청껏 부르던 사람들에게 모포는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모포는 군대생활을 마친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줄 것임에 틀림없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