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금융읽기] 중앙은행 총재들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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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세계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심기가 불편한 때도 없을 것 같다.
어느나라에서나 의도한 금리변경이 쉽지 않은 데다 정책실기론과 함께 조기퇴임론에까지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그린스펀 의장은 금리를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증시와 경기여건이라면 종전에는 금리를 과감하게 내렸을 것으로 보이나 현 금리수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지난주 열렸던 정책이사회에서 금리를 현 수준에서 동결한 듀젠베르그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비슷한 입장이다.
일본은행의 하야미 총재는 사정이 더 급하다.
갈수록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경기와 증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은 심정이야 어느 중앙은행 총재보다 강할 것으로 보이나 이미 정책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져 어쩔수 없이 손을 놓고 있다.
한국은행의 박승 총재도 부동산 투기와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싶다는 내심을 계속해서 비쳐왔으나 여러 제약요건 때문에 금리를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그러나 여운은 계속 남아 있다.
다음달 회의에서는 금리가 인상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일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 들어 경기와 증시문제에 대해 중앙은행 총재들이 무력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미 각국의 정책금리가 떨어질대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적정금리를 산출하는 테일러 준칙(Taylor's rule)을 통해 각국의 금리를 파악해 보면 적정수준에 비해 너무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이 상황에서 금리를 더 내릴 경우 '부채-디플레 신드롬(debt-deflation syndrome)'이 더욱 확산돼 부동산과 같은 실물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중앙은행 총재들이 경제 거품을 키웠다'는 비난의 소지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단순히 경기여건만을 고려해 금리를 변경하지 못하고 있다.
종전에 비해 금리정책의 효과가 작은 '금리정책의 반감론'이 제기되는 것도 원인이다.
이론적으로 금리정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이 금리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불행히도 최근에는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금리와 총수요간의 관계가 비탄력적(inelastic)이어서 금리정책의 효과가 뚜렷하지 못하다.
더욱이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입지가 갈수록 약해져 종전처럼 소신있는 행동도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 9·11테러 이후 '작은 정부론'보다 '큰 정부론'이 국민들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정책의 주안점이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넘어간 듯한 분위기도 중앙은행 총재들의 입지를 좁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최근과 같은 증시와 경제여건에서 경제주체들은 중앙은행 총재들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요구에도 불구하고 외형상으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정책실기론과 함께 조기퇴임론이 일고 있는 배경이다.
올들어 그린스펀 의장은 고령문제로 계속해서 조기퇴임론에 시달려 왔다.
최근 들어서는 '금리를 적기에 내리지 못해 증시와 경기가 더 침체되고 있다'는 정책실기론까지 겹쳐 주요 매체를 통해 비쳐진 그린스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정도차는 있으나 듀젠베르그 총재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본의 하야미 총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세계 어느 중앙은행 총재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으나 그만큼 일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으나 이런 점에 있어서 박승 한은 총재는 상대적으로 나아 보여 다행이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정책금리를 변경하지 않으면 시장금리가 안정될 것이라는 최근 일부의 시각은 경계해야 한다.
물론 한나라의 정책금리와 시장금리간 금리체계(interest system)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최근 들어 금리체계를 흐트러뜨리는 요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재정적자 확대와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다.
재정적자로 정책금리와 시중금리간의 괴리가 심화되고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로 효율적인 금리체계가 유지되지 못하는 것도 중앙은행 총재들에게는 또다른 부담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논설·전문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