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붐도 그들을 유혹하지 못했다. 소규모 창업도 별 매력이 되지 못했다. 학교 졸업 이후 인생 전부를 회사에서 보낸 그들에게 다시 승부를 걸 곳은 역시 회사였다.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해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경영"이 그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알짜배기 중견기업에서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퇴직자들이 부실기업의 법정관리인으로 제2의 직업 인생을 활짝 피워가고 있다. 정책 차원의 구조조정이 한물결 지나갔다면 이들이 구조조정의 매듭을 지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기업.중견기업들의 성공 경험이 부실기업의 회생으로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기업 출신 법정관리인의 산파역을 맡고 있는 것은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한국생산성본부. 이들 두 단체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한국에도 경영자풀,구조조정전문가집단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법정관리 과정에 먼저 주목한 것은 경총이다. 경총은 각 지방법원 파산부의 요청을 받아 지난 97년부터 지금까지 전직 기업체 및 금융기관 임원 6백41명을 대상으로 법정관리인 교육을 실시했다. 이 가운데 1백36명이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됐다. 법정관리인은 대부분 53~55세의 대기업 상무.전무.부사장 출신이 70%에 이른다는 게 경총 고급인력정보센터 김근 소장의 설명이다. 과정 이수자 가운데 지난해 11월 진덕산업 관리인으로 선임된 이상권씨(56)는 경남기업 이사,진로건설 전무를 거쳐 LG건설 부사장까지 지낸 건설업계의 베테랑 경영인이다. 올 3월 (주)메디슨의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최균재씨(55)는 지난 74년부터 2000년까지 강원산업에 몸담아 사원부터 전무까지 오른 전문경영인. 자금 인사 영업 구매 기획 등을 두루거쳤고 회사 합병으로 퇴직하기 직전에는 구조조정본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생산성본부는 지난 98년말부터 법정관리인 양성과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4백51명이 과정을 수료했고 법원 법정관리위원 관리인 감사 등을 포함 모두 49명의 법정관리인력을 배출했다. 특히 염태환(서울지법) 고재화(수원지법) 김우회 권영웅(이상 대구지법)씨 등 법원 관리위원회 관리위원들을 4명이나 배출한 것이 생산성본부의 자랑이다. 현재 활동 중인 법정관리인 가운데는 김재휘 동서산업 관리인(61.전 임광토건 및 충청일보 사장) 박건호 영흥철강.대흥산업 관리인(62.전쌍용중공업 상무) 이광호 삼립식품 관리인(55.전 한화파이낸스 대표) 심명대 도투락 관리인(51.전 대동주택 전무) 한정락 성우전자 관리인(61.전삼성전자 상무) 등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법정관리는 기업이 스스로는 도저히 회사를 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부실해졌을 때 법원에서 지정한 제3자가 자금과 기업활동 전반을 대신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임기는 2년이지만 임기 만료후 법원이 다시 선임하면 관리인 업무를 계속 수행할 수도 있다. 보수는 연 3천만원 수준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7천만원 정도를 받기도 한다. 통상적으로는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오기 전 CEO들이 받던 보수의 50~70% 수준이다. 성우전자 한정락 관리인은 "정상적이지 않은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한참 뒤에서 출발해 달리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특히 유동성이 부족해 기회를 보고도 제대로 투자하지 못할 때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퇴직 후에도 살리는 것은 사회에 대한 공헌"이라며 "법정관리인들이 전문경영인시대를 앞당기는 촉매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