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은 비에 묻혀서 왔다. 태풍이 불어 살아온 집이 빗물에 떠내려가고,땀 흘려 지은 벼들이 황토색으로 변해버리고 나니 가을은 마치 익숙해져버린 거리풍경처럼 그렇게 다가와 있는 것이다. 가을이 왔건만 가을 같지 않은 계절의 변신 앞에서 잠시 어리둥절해지는 것이다. 더 못살았던 어린 날에도 추석이 다가오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었다. '이번 추석에는 운동화라도 한켤레 신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밤에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와 별이 무성한 하늘을 보게 하기도 했고,할머니가 쑥을 다듬던 모습을 떠올리며 쑥떡 먹을 기쁨에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나와 우리 가족 누구도 이런 별자리로의 꿈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추석에는…'하고 밤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지도 않았다. 이는 너무나 황폐해진 수해의 상처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나뭇잎이 변해가는 서글픔보다는,오늘의 생활이 야박해진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삭막함 속에서 따뜻했던 인간다운 삶의 정경이 그리운 탓인지 올해 가을은 유난히 지나간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잡지사에 입사해서 1년쯤 지났을 때였다. 잡지사 형편이 나빠지자 월급이 밀려서 손톱만큼씩 나오고 있었다. 모두 외상쟁이가 돼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동생이 "월급을 탔을 테니 용돈을 좀 달라"고 하는 데 주머니가 비어 "그만 두는 게 낫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는 "돈 보고 취직한 것이 아니잖아" 하며 나를 무섭게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피했다. 이렇게 회사에 나가고 있을 무렵 추석이 다가왔다. 어느 날 아침 회사에 나가서 자리에 앉으니 옆의 동료가 "추석 보너스를 준대"하는 것이었다. 온 회사에 '보너스 준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날 해가 질 무렵 드디어 사장실에서 면담이 있다는 전갈이 왔고,한사람씩 불려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몰래 봉투를 펼쳐보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돼 사장실에 들어갔다. 사장은 "총각이라 더 고생했지"하고 봉투를 주며 "밀린 월급에서 얼마를 마련했어.추석을 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우려고…"라고 했다. 사장실에서 나와 내 자리에 앉아 펼쳐보니 보너스는커녕 밀린 석달치 월급 중 한달치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총각이라서'라던 사장의 말이 떠올라 가족을 거느린 동료들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났다. 그날 저녁 친한 동료끼리 회식을 했다. 사장은 사람에 따라 '어머니를 모시며' 혹은 '애들이 어린데'하고 각각 직원의 사정에 따라 위로의 말을 달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 한사람 사장을 비방하거나 임금을 다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이는 사장의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을 주머니가 텅텅 빈 추석을 보내고,낙엽이 구르는 거리를 허리를 굽힌 채 걸어 다녔다. 그런 가운데서도 회사에 가면 동료가 추석에 먹다 남은 송편을 가져와 함께 먹으며 히히덕거렸고,어디서 "누가 담배 없냐"하면 나는 주머니에 남은 몇푼을 들고 회사입구에 있는 담배가게로 달려갔다. 그 해 가을 비록 손에 넣은 것은 아무것이 없어도 훈훈하게 사람끼리 의지해 살았던 기억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이 가을 하늘은 그 때처럼 푸르다. 들판에 고개 숙인 벼이삭은 옛날보다 더 퉁퉁하다. 그리고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곡물들은,밥 한톨 더 먹으려고 손을 내밀다 머리통을 쥐어 박히던 옛날과는 달리 풍성하다. 그런데 요즘처럼 날씨가 서늘해지면 옷깃으로 스며드는 찬 기운이 심장조차 떨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쪼들리고 힘들지만 서로 의지하고 살던 마음이 '알맹이 없는 쭉정이'가 돼 빈 들에 뒹굴고 있다. 이제 이 가을,낡고 바랜 옷을 입고 새를 쫓던 허수아비가 '나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서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도,들판과 함께 어울려 멋을 담고 있듯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이 가을 이룬 것 없어 빈손으로 서 있어도,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budget12@yaf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