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 여행] 돛...바람 품고 낭만 머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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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만만찮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시선을 압도한다.
길이 41m, 폭 6.6m, 무게 99t의 날렵하면서도 육중한 몸매.
까마득히 치솟은 33m 높이의 마스트도 당당하다.
건조된지 20여년, 짧지 않은 세월의 흔적이 훈장처럼 느껴지는 범선(帆船) 코리아나호.
세계 최대 규모라는 칠레의 에스메랄다호에 비하면 어른과 청년 차이지만, 범선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명물이다.
여수의 소호요트장에서 그 코리아나호(선장 정채호)를 타보았다.
범선은 돛에 안기는 바람의 힘만으로 가는 배이지만 출항시에는 엔진의 힘을 빌린다.
처음부터 돛을 펼쳤다가는 자칫 계류장에 부딪쳐 선체가 손상을 입을수 있기 때문.
3백80마력의 엔진은 뜻밖에 조용하다.
돌기처럼 좌우로 뻗어 내린 여수 돌산도와 화양면 땅, 앞쪽의 백야도, 개도, 화태도 등으로 둘러싸인 가막만이 커다란 호수처럼 잔잔하다.
계류장을 나선지 30여분.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엔진 정지!"
이날 선장 대신 배를 지휘한 기관장의 지시에 맞춰 함께 승선한 코리아요트스쿨 소속 요트선수들이 잽싸게 몸을 놀려 돛을 펴기 시작한다.
먼저 돛덮개를 걷어낸 뒤 줄을 잡아당겨 4개의 삼각돛을 차례로 펼쳐 올린다.
바람을 받은 돛이 곧 한 쪽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마지막으로 펼쳐진 제노아(최전방 돛)가 한껏 바람을 품는다.
코리아나호는 마침내 범선으로서의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제서야 속도감이 느껴진다.
뱃전에 부딪쳐 갈라지는 바닷물이 흰 포말을 이루며 쏜살같이 선미쪽으로 빠진다.
바람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다 한가운데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스트를 치고 올라갈 때 잠시 펄럭였던 돛도 찢어질 듯 부풀어올라 팽팽한 긴장감만 줄뿐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람이 강해지자 배가 45도로 비스듬히 누워 질주한다.
뒤집힐 염려는 없다.
배 무게의 절반 가까운 40t의 납덩어리가 바닥에 깔려 무게중심을 잡아준단다.
'영화 타이타닉의 명장면을 연출해 볼까?'
그러나 범선의 상징물인 비크 헤드(Beak Head) 때문에 여의치 않다.
조금은 심심하다.
정 선장이 출항 전에 한 얘기를 떠올린다.
"범선에 타면 모두가 항해사이고 선원이다. 관광객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두들 원활한 항해를 위한 일에 참여해야 한다."
기관장이 내주는 러더(키)를 잡아본다.
한아름되는 원형 러더는 큰 힘을 주지 않아도 빙빙 잘도 돌아간다.
러더 바로 앞에 첨단 위성항법장치(GPS)가 있다.
바람이 잦아들어 제노아를 접을 때는 힘을 줘 줄을 당기며 선원이 되어 본다.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해진 사도에 닿은 코리아나호는 기수를 돌려 소호요트장으로 향한다.
가을 바닷바람이 조금은 쌀쌀하다.
갑판 위에 두 팔을 벌리고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대자연에 안겨, 발가벗은 채 온 하늘을 혼자 끌어안고 있는 듯한 기분이 썩 괜찮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더욱 환히 빛나는 돛이 그 낭만의 시간을 길게 늘려준다.
여수=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