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어두워진다. 어딘가 따스한 곳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막 저녁이 내리는 길을 보고 있다. 약간의 안개, 약간의 어둠, 약간의 쓸쓸함이 있는 길. 그 길이 가슴에 밀려든다. '쓸쓸함 한가운데 고립된 행복감'이랄까. 바삐 사는 긴장과 쓸쓸함 속에서 평화로움을 느낀다. 꼭 행복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욕망에 흔들리지 않아서다. 나무를 보고 있으면 내가 나무여도 좋고, 바람이나 구름이어도 괜찮다는 기분. 잠시라도 아무 억압도 없고, 오랫동안의 걱정도 뒤로 물러간 상태. 물 한잔과 책,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음악, 좁더라도 내 몸 하나 눕힐 공간이 있는 상태. 이 상태가 고마워 계속 유지하고 싶은데, 이것도 쉽진 않다. 그러나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안다. 그저께 독일 현대 사진전에서 본 작품 '사무치는 그리움'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전시장에서 본 초췌한 여성들의 사진.그 뒷면에 그녀들이 사용한 주사와 담배, 주사바늘 자국들…. 그녀들은 늙은 창부들이었다. 병에 걸리고, 약으로 술로 담배로 겨우 삶을 이겨나가는 여인들. 자세한 생활은 알 수 없지만 자기 혼의 성장을 위해 여가를 즐길 수도, 어쩔 도리도 없이 절망 속에서 죽어갈 뿐인 삶이 눈에 선했다. 더군다나 제목이 '사무치는 그리움'이어서인지 여인들의 눈빛이 지금껏 내 마음을 놔주지 않는다. 그렇게 애절히 뭔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짊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여인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어찌 독일만의 것일까. 가부장 사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방치된 그녀들의 문제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더 넓게 세상의 그늘진 곳에 사는 모든 소외계층의 복지문제. 우리가 이를 깊이 생각 안할 수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기쁨이나 어려움이나 함께 나누는 것이므로. 내 처지에서 그들을 위한 일이 무엇일까. 이런 글 말고도 할 일이 뭘까를 생각해 본다. 좋은 전시회를 통해 본 시대의 기록이 진정 따뜻한 사람의 숨결과 손길이 그리운 계절이긴 하다. < malrina@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