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요리 교수 메시지 ] "과학자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새로운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단순명쾌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 지난해 10월 일본의 10번째 노벨상 수상자(화학)로 결정되면서 장기불황에 지치고 찌든 일본 국민들에게 가뭄 속 단비와 같은 환희를 안겨 준 노요리 료지 나고야대 교수(64). 왕궁이 바라보이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만난 노요리 교수는 "노벨상이라는 목표를 겨냥하고 학문에 정진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성과를 세계가 인정해 줘 기뻤다"고 회고했다. 그는 "화학은 섬세하고 치밀한 동양인들의 기질에 잘 맞아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인 유전자 속에는 백제 시대에 일본에 전래된 기능과 정신, 그리고 문화가 숨쉬고 있다"고 한국과의 인연을 각별히 강조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 정상급 과학자로부터 21세기 과학강국을 만들기 위한 지혜와 이를 위해 정부 국민들이 해야 할 일 등을 들어 보았다. [ 대담 = 양승득 도쿄 특파원 ] ----------------------------------------------------------------- -과학도의 길을 걷게 된 동기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를 겪으며 자란 나는 중학교에 진학한 후 공과대학 출신인 부친의 손을 잡고 따라 간 한 강연회에서 나일론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습니다. 석탄과 물과 공기에서 섬유가 만들어지다니…. 이 때 단순한 것에서 엄청난 것을 만들어 내는 과학이야말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부친이 평소 과학관련 잡지나 샘플을 수시로 보여준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대학(교토대)에 들어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과학자가 되겠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됐습니다." -일본이 올해 물리와 화학에서 노벨상을 받아 기초과학 분야에서 모두 9차례 수상했습니다. 특히 화학분야는 4회나 됩니다. 화학분야가 빛나는 성과를 올린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웃으면서) 아직도 적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나는 일본 화학계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화학은 인내심이 강해야 합니다. 실험 결과 하나를 얻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학은 참을성이 뛰어난 동양인들의 기질에 잘 맞는 학문입니다. 작고 세밀한 것을 놓치지 않는 기술과 감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믿습니다." -경제산업성이 기술실용화를 위해 관.민 합동으로 생명공학 정보통신 등 4개 분야 30개 사업을 중점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과학기술입국 정책은 산업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를 추진하고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부가 만들고, 정부가 하는 일이지,과학자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두뇌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정부가 3년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과학정책은 3년뿐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계속돼야 합니다. 이와 함께 기술연구에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이를 끌고 갈 인재를 육성하는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경제사정 악화에 따라 국가경쟁력도 중진국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학기술만을 놓고 본다면 일본의 실력에 어느 정도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은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제조업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 왔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조, 즉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의 '작'(作)이나 '조'(造)는 정해진 것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제조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연구하는 '창'(創)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일본 재계가 이공계 박사의 채용에 소극적이란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제상황이 나빠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기술입국 시대입니다. 한국도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박사학위 소지자가 석사 학사보다 일자리 얻기가 더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연구개발 실력이 경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입니다. 일본의 경제부흥을 떠받쳐 온 것은 제조업이지만 제조업은 중국의 추격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연구개발에 힘을 쏟겠지만 기업들도 높은 연구능력을 가진 고급 두뇌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등 어린이들이 이과 공부를 싫어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도 대책에 고심하고 있지만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올해부터 주5일제 수업으로 공부시간이 오히려 줄었다는 고민이 많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의 이과 지식력을 강화하는 데 우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 사회 전체가 이과와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학을 가르치고 담당하는 이들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분위기가 뿌리내려야 합니다. 과학기술은 반드시 양면성을 갖고 있으며 여기서 좋은 면만 취해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일정한 이과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과학자의 길을 걸어 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을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연구가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과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고 그 중에서도 항상 하고 싶은 것을 해왔기 때문이지요. 물론 어려운 문제들과 싸우는 것이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도전할 만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과학 중에서도 물리와 생물이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인데 반해 화학은 자기 의지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 힘들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 없는 인공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항상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었던 것이지요." -과학분야에서 한국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중요한 것은 독창성입니다. 대다수 과학자들이 특정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땀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도 그런 경향이 강한 게 사실이지만 동양의 과학자들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만들어진 문제를 푸는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더 어려운 것은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연구의 해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이런 훈련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강한 것을 더욱 강하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나라 모두 연장자를 존경하는 전통이 있지만 전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와 습관이 부족합니다. 윗사람 말을 잘 듣는 것도 당연하지만 이를 80% 정도로 본다면 나머지 20%는 자신의 의지로 새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