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제 필립스전자 사장은 크리스마스 카드 모양의 명함을 들고 다닌다. 필립스전자 사장이라고 새겨진 커버를 열면 LG필립스LCD 이사회 부회장이 윗장, 대한하키협회 회장.국제하키연맹 집행위원.대한체육회 부회장이 아랫장에 각각 새겨져 있다.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필립스전자 사장이라는 본업을 잘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란다. "98년 1월에 보니까 큰 일이 났더라구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위기를 기회로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신 사장은 그해 1월 '필립스와 우리나라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사업을 필립스의 네덜란드인 회장에게 제안했다. 삼성전자 산하였던 소형 가전사업, LG전자의 액정표시장치(LCD) 사업 및 일부 국내 조명사업체에 투자하라는 보고서를 낸 것이다. 필립스는 그후 1년쯤 지나 LCD를 골라 16억달러를 투자했고 신 사장은 LG와 필립스가 만든 합작사의 이사회 부회장이 됐다. "꼭 첩보영화 같았죠. 프로젝트 이름은 이글, 우리가 크리스탈, LG 이름은 본드였어요. 기업과 나라간 문화 차이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결렬될뻔 해 중간에서 애도 많이 먹었습니다. 마침내 회장끼리 만나더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서로를 대하더군요." 필립스는 2년 후인 2001년엔 LG전자와 브라운관(CRT) 사업을 합쳐 두번째 합작사인 LG필립스디스플레이도 만들었다. 이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CRT는 특수한 경우였고 우리는 분단에서 오는 안보 문제와 고임금 때문에 첨단 기술이 아니면 외국에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오기가 힘들어요." 필립스의 경우 지금까지 중국에 30여개나 합작사를 만들었지만 한국은 LG와의 합작이 첫 케이스였다. "싱가폴이나 홍콩 같이 우수한 케이스를 조사해 될 수 있으면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것밖에 길이 없어요. 오라고 한다고 오나요. 우리가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되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것 아닙니까." 신 사장은 외국회사에 대한 인식이 극적으로 개선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필립스에서 27년을 일했는데 처음엔 수입만 하고 우리 경제에 보탬이 안된다고들 비난했죠. CEO가 된 93년 이후엔 기업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지는게 제 일이었습니다." 그는 최전방 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TV를 제공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핸드볼협회장을 시작으로 애틀랜타 올림픽단장을 거쳐 지금은 하키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이어 에펠탑 조명을 설계한 디자이너를 데려와 국내 문화재 조명을 시공, 기증하는 '문화재 밝히기'도 추진했다. 덕분에 동대문.광화문.이순신장군 동상.경주 첨성대가 환해졌다. 외국기업이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국내에서 구매해 전세계 필립스에 공급하는 부품 규모를 98년 4천5백만달러에서 현재 5억달러로 늘리는 데도 한몫했다. "월드컵 때 네덜란드 기자가 히딩크 감독 덕분에 회사 인지도나 이미지가 좋아졌느냐고 물었어요. 전 아니라고 했죠. 기업 이미지란 10여년을 쌓아도 모자라는데 월드컵 때 깜짝쇼 한다고 될 일이냐고요. 제 임기 동안 계속 노력해야죠."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