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그런 일이 다시 닥치면 견뎌낼 수 있을까.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지난 96년 회사는 경기도 분당 금곡동에 37층짜리 오피스텔을 세워보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경부고속도로변에 3개의 오피스텔을 나란히 세워 뉴욕 쌍둥이빌딩(지금은 테러로 무너졌지만)에 버금가는 명소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프로젝트 명은 '트리폴리스'. 당시 총괄부사장으로 프로젝트를 맡았던 나는 2백70억원을 주고 5천평 부지를 사들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부지를 사들인 지 1년이 지났을까,악몽같은 'IMF 사태'가 터졌다. 부동산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오피스텔의 분양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자금이 묶이면서 회사 사정은 어두워만 갔다. 프로젝트의 무산은 물론이고 시간이 갈수록 회사마저 깊은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경기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데다 설계를 국내업체에 맡기느냐 미국업체에 부탁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면서 시간을 끈게 화근이었다. 은행을 너무 믿은 것도 후회로 다가왔다. 96년 당시 회사는 주거래은행인 A은행을 제쳐두고 B은행에서 적잖은 돈을 빌렸다. "A은행보다 1%포인트 낮은 금리로 빌려주겠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그러던 B은행이 상환을 요구해왔다. 임직원들은 매일 돌아오는 어음을 막는데 급급했다. 연 34%짜리 자금을 쓰라는 사채업체의 유혹이 귀를 간지럽혔다. 나 자신이 은행원 출신이면서도 언제든 맘만 먹으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 견디다 못해 98년 10월 모델하우스를 오픈하고 분양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이었다. 분양사무소와 사무실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시시각각 접수결과를 통보받으며 마음 졸여야 했다. 임원들은 분양률이 50%를 밑돌 것이라 수근거렸고 분양결정을 내린 데 대해 비웃기도 했다. 그룹 원로들마저 "무모한 결정이 아니냐"며 안쓰러워 했다. 초조하게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예상밖의 성공이었다. 분양 대행업체들에 수수료를 대폭 올려주고 큰 경품을 내걸었던 것이 주효했다. 무엇보다 해당 지역의 유일한 오피스텔 분양이었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됐다. 어쨌든 자금사정은 정상화됐다. 하루 하루 목숨을 부지하면서 배운 교훈은 역시 '현금흐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99년 사장이 된 이후 가장 강조하는 경영 캐치프레이스는 '캐시플로(cash flow) 최우선 경영'이다. 막무가내로 자금을 회수해갔던 B은행은 자금사정이 정상화된 이후 다시 찾아왔다. 지난번 처럼 금리를 낮춰줄테니 돈을 쓰라고 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지만 이자비용을 아낀다는 생각에 꾹 참고 빌려쓰고 있다. 하지만 그룹 원로가 해 준 충고는 여전히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 "은행이란 말이야 햇볕이 쨍쨍할 땐 우산을 쓰라고 빌려주지만 정작 비가 쏟아지면 그 우산을 빼앗아 간단 말이야." 정리=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