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감나무 밑에서 .. 이병훈 <남양알로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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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lee@univera.com
충북 진천에 있는 우리 공장에는 나무가 많다.
처음 공장을 지을 때부터 천연물을 다루는 회사이니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심기 시작한 나무들이 이제는 제법 우거진 숲을 이룰 만큼 튼실한 거목으로 자라났다.
잣나무와 소나무,주목과 느티나무….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각기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중에서도 감나무는 직원들에게 단연 인기다.
요즘처럼 감이 익는 계절이 오면 직원들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감나무 아래로 하나둘씩 모여든다.
감은 가지를 붙잡고 흔들어 털면 깨져서 못쓰게 되기 때문에 정성스레 한 개씩 직접 따야 한다.
감을 따는 동안 이걸 따자는 둥 저걸 따자는 둥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한아름 따낸 감을 견줘보고 서로 권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더없이 천진해진다.
그때만큼은 직급도,나이도 없다.
그저 공평히 한 사람 앞에 한 알씩이다.
내 손에 쥐어주는 감 한 알에는 그것을 건네준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묻어 있다.
나는 그 감이 좋다.
가을 내내 쏠쏠한 후식거리로 감을 따먹고 나서 직원들은 감나무 그루마다 으레 몇 알씩의 까치밥을 남겨둔다.
특별히 그래야 한다고 단속하는 사람도 없으련만 무언의 약속인 양 까치밥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에도 우리 조상들은 까치밥을 남겨놓는 여유를 가졌었다.
그걸 까치가 먹든,까마귀가 먹든,혹은 배고픈 이웃이 슬며시 서리를 해가든 무슨 상관이었으랴.
사람과 사람이 함께 나누고,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유하는 까치밥 몇 알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란,잘 무른 홍시만큼이나 포근하고 달콤하다.
세상이 뒤숭숭하니,내년에는 우리 경제가 한층 어려워질 거라는 전망이 무성하다.
특히 노사갈등이 더 첨예해질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는 경제전문가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비관적인 경제전망이 실린 신문을 읽다 문득 진천공장 뒤뜰의 감나무를 생각했다.
누구나 주인이되 아무도 혼자 탐식하려 들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사람과 자연이 함께 나누는 그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고 싶다.
옛 어른들이 까치밥을 남겼던 건 감이 남아돌아서가 아니었다.
힘들면 힘든 대로 쪼들리는 살림을 꾸리면서도 함께 나눌 줄 알았던 옛 분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손잡고 애써보자는 얘길랑,조용히 가슴속에만 담아두어도 상관없겠다.
그저 이 가을,정겨운 이들과 함께 먹는 빛깔 고운 홍시 몇 점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