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금융 및 민간기업부문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실시됐으며 부실화된 은행에는 거액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IMF(국제통화기금)의 주도로 국내 금융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도 이뤄졌다. 이로 인해 한국은 외환위기를 함께 겪었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외환보유액도 이미 1천억달러를 훌쩍 넘어 '안정권'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한국경제신문은 최근 국제금융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를 초청,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과정을 재점검하고 향후 한국경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살펴보는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이번 좌담회에는 매키넌(Mckinnon)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클라센스(Classens)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교수, 정덕구 서울대 국제금융센터 소장, 조윤제 서강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최근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는 고성장의 유혹에서 벗어나 안정 위주의 정책을 펴 나가야 한다"며 "기업이나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에도 꾸준히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참석자 > 로널드 매키넌 < 스탠퍼드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 스티즌 클라센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교수 > 정덕구 < 서울대 국제금융센터 소장 > 조윤제 <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 ----------------------------------------------------------------- 매키넌 교수=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가장 큰 요인은 지난 99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정보기술(IT) 시장의 급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 IT분야, 특히 컴퓨터칩 부문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조윤제 교수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시장이 견조하게 성장한 점도 빠른 회복에 기여했다. 대규모 공적자금이 과감하게 투입돼 금융시스템을 조속히 개선하고 위기탈출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정덕구 소장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신뢰를 빨리 회복한 것이 주효했다. 정부의 경제개혁이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국제 금융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정부의 개혁조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한국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를 상당부분 털어낼 수 있었다. 클라센스 교수 =다른 나라와 달리 강력한 리더십이 뒷받침됐다. 부실 채권 처리에 있어 이같은 점이 큰 힘을 발휘했다. 정 소장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는 동남아시아의 각 국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숨기는 바람에 위기에 대한 공조체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위기가 다른 국가로 급속하게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향후 아시아에 다시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지난 97년과 같은 전염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는가. 매키넌 교수 =아시아국가들은 지난 외환위기에서 은행이 외국자본에 지나치게 노출될 경우 어떤 위험이 닥치게 되는지를 절감했다. 이후 각국 은행들은 부실자산을 정리하는 동시에 외국 자본의 이동에 대한 감시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위기가 전염되는 것을 막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예전처럼 위기상황이 국경을 넘어 확산될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본다. 조 교수 =최근 들어 아시아 각국의 은행 시스템은 외환위기와 같은 외부충격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됐다. 단기부채의 규모도 크게 감소했고 기업들의 부채비율도 낮아졌다. 클라센스 교수 =지난 97년과 같은 형태의 위기가 주변국가로 급속히 파급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반면 미국 경제가 침체하면 아시아국가의 경제상황이 함께 악화될 수는 있다. 또 다른 전염효과인 셈이다. 조 교수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비교적 양호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위기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진 못한 것 같다. 또다시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외환위기와 같은 시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가. 정 소장 =정부는 우선 고성장의 유혹부터 떨쳐 버려야 한다. 최근 세계 경제가 동반 하락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경기흐름이 '소프트 랜딩(연착륙)'할 수 있도록 정책을 현실성 있게 운영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자본시장을 키워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매키넌 교수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을 지속해야 한다. 외환변동으로 인한 리스크에 과다노출되지 않도록 은행시스템을 선진화하는 작업도 추진돼야 한다. 통화당국이 외환보유액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클라센스 교수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정부의 금융정책이나 기업의 투명성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시장중심적이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같은 경제구조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어떻게 높은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한국시장에 새로운 투자자를 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모든 경제문제가 시장논리에 의해 해결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조 교수 =최근 들어 학계에서는 한.중.일 3국간 자유무역지대(FTA)의 설립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동북아 3국간 FTA가 설립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매키넌 교수 =한국과 일본은 농산물수입에 대해 오랫동안 매우 높은 장벽을 유지해 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일 양국이 중국의 농산물 수입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개인적으로는 FTA보다는 WTO를 통한 자유무역의 확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정 소장 =FTA의 설립은 정치적 지역적 문화적 특성을 고려할 때 우선적으로 한.중.일 3국이 균형체제를 이룬 후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과 시장통합을 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 FTA는 창설과정에서 국가간 첨예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설립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본다. 클라센스 교수 =한.중.일 3국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국가가 중국이다. 한국과 일본은 그나마 경제구조가 비슷하지만 중국은 경제시스템이나 발전수준에서 차이가 많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3국간 FTA를 창설하기는 힘들것 같다. 정 소장 =최근 들어 미국의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공습이 시작될 경우 유가상승과 심리적 불안으로 전세계적인 투자위축이 우려되고 있다. 향후 미국 경제를 어떻게 보는가. 매키넌 교수 =미국의 '더블딥(짧은 경기회복후 재침체)'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미.이라크간 전쟁에 대한 우려보다는 오히려 연이은 회계부정 등으로 인한 미국 기업의 신뢰 추락이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부의 효과(wealth effcet)'로 가계소비가 늘어나면서 경제를 지탱하고 있지만 불안한 상황이다. 클라센스 교수 =미국 경제는 당분간 침체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이다. 하지만 '더블딥'을 우려할 수준으로 경제가 악화되진 않을 것이다. 미.이라크전이 발발하더라도 마찬가지다. 9.11 테러의 충격이 길게 지속되지 않은 점에 비춰봐도 그렇다. 미국은 전쟁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경제 및 금융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