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경제가 고용시장 경색으로 인한 소비자 신뢰 하락과 증시`거품' 폭발 및 이라크전 위협으로 인해 좀처럼 회복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유로권 주요 경제국인 독일과 프랑스가 현실적 어려움을 빌미로 재정적자 목표를 `융통성'있게 운영하자는 입장을 노골화하고 있다. 경제난 극복을 위해 전가의 보도로 사용돼온 유혹에 빠져든 것이다. 목표 달성을 엄격하게 관리해야할 EU 집행위마저 이런 입장에 동조하기에 이른 상황에서 재정 상태가 상대적으로 견실한 네덜란드 등 다른 유로국들은 독일과 프랑스에 불만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현 상황을 감안할 때 차입을 줄이는 것보다 감세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재계를 대표하는 프랑스경영자협회의 에르네스트 안토닌 세이에르 회장은 이 방침에 회의적이다. 그는 이것이 정부가 내년에 실현하길 희망하는 2.5% 성장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세이에르 회장은 "금융시장과 지정학적 불안 등이 새삼스럴 것도 없이 정부를 무력하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로 출범 후 별 무리없이 통화 정책을 수행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유럽중앙은행(ECB)도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역내 인플레를 목표치인 2%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정작 핵심인 소비자 신뢰를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감원하면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자들이 자동차와 집 등 큰 돈이 들어가는 구입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시장 경색은 쉽게 풀리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 피아트는 지난주 국내 공장인력의 5분의 1인 8천100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독일의 지멘스와 도이체 텔레콤도 모두 8만5천명을 감원할 계획이라고 밝혀 노조와 마찰을 빚고 있다. 세계적인 현상인 증시 불안도 유로 경제에 타격을 가하고 있다. 독일의 닥스지수는 지난 3월 이후 무려 40% 이상 주저앉았다. 최근 며칠 사이 반등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예전의 활력은 되찾지 못하고 있다. 독일상공회의소측은 이에 대해 "추운 겨울을 준비해야할 것 같다"면서 "경기 후퇴 조짐이 완연하다"고 지적했다. 경제 전문가들이 현재 가장 걱정하는 것은 미국이 과연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것이 이라크는 물론 중동 전역으로 불안을 확산시켜 유가가 오르고 결국은 세계경제 회복의 발목을 더 강하게 붙잡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소재 드레스너방크의 하랄드 요르그 연구원은 "이라크전이 터지면 진짜 불황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렇게되면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드레스너방크측은 그러나 이라크전이 터지지 않는다면 유로권이 내년에 1.9% 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낙관한다. 은행측은 앞서 성장 전망을 2.3%로 내세웠다가 이 수준으로 하향조정한 바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재정적자목표 달성에 융통성을 부여하자고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자크 시리크 프랑스 대통령은 유로 출범의 기반이 된 `유럽안정성장협약'이 재정적자율을 국내총생산(GDP)의 3% 밑으로 묶는 내용인데 대해 "현실에 맞게 융통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까지 가세했다. 그는 17일자 르 몽드 회견에서 "협정(의 재정적자 규정)이 완고하기 짝이 없다"면서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란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가 최근 집행위에 균형재정 목표연도를 당초 설정했던 2004년이아닌 2006년으로 연기하도록 허용해달라고 설득하는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네덜란드는 반발하고 있다. 한스 후거보르스트 재무장관은 "현재의상황이 개탄스럽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개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재정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난관을 돌파해서는 안된다는 비판론자들도 후거보르스트 장관과 같은 입장이다. 유로권 정계에서는 이와 관련해 ECB가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일찌감치부터 압력을 가해왔다. 그러나 빔 두이젠베르그 ECB 총재의 입장은 확고하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물가 안정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ECB의 기본 방침"임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ECB가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해 머지않아 금리를 하향조정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한다. 유로 경제가 이런 내홍을 겪는 상황에서도 유로 환율은 지난 몇주 사이 별다른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로는 17일(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 외환시장에서 달러에 대해 유로당 97센트 내외 수준에 거래됐다. (베를린 AP=연합뉴스) jks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