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8시40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의 통상정보지원팀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벌인 양측 정부 대표단이 상품 양허(시장개방)안에 대한 이견 절충을 마치고 가서명 문안 작업에 착수,21일 오전 3시(현지시간 오후 8시)쯤 협상 타결을 공식 발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부의 긴급 연락을 받은 주요 언론사들은 다음날(21일) 조간으로 협상타결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협상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금융서비스 시장개방이란 새로운 암초가 떠올라 협상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 이때부터 우리측 협상단에서 내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통상 주무부처인 외교부는 24∼26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FTA 타결을 발표하기 위해 어떻게든 협상을 매듭지으려 한 반면,금융 소관부처인 재정경제부는 금융시장을 양보할 수 없다며 극한 대립을 벌인 것. 한국대표단의 내분을 간파한 칠레측은 협상을 결렬시키든지 양보하든지 빨리 결론을 내라며 여유를 부렸다. 결국 양국간 협상은 21일 오후 9시까지 지루하게 계속됐지만 합의 도달에 실패한 상태로 막을 내렸다. 이번 기회에 '한건'을 올리려고 한 외교부의 조바심 탓에 '협상 타결'이 하루만에 '타결 연기'로 뒤바뀌는 촌극이 벌어진 셈이다. 그러나 외교부는 22일 밤 11시 보도해명자료를 통해 "협상 타결을 발표한 적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기자들에게 전화로 '통보'를 한 걸 두고 '발표'는 아니었다고 둘러댄 셈이다. 과거 통상 협상과 마찬가지로 교묘한 외교적 수사를 통해 책임떠넘기기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내년부터 선진국과 개도국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여야 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 개발 아젠다(DDA·일명 뉴라운드)' 협상이 본궤도에 오르고 일본 멕시코 등 한국과 교역규모가 큰 국가들과의 FTA 협상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통상 협상을 책임 회피에 급급한 외교부에 계속 맡겨둬야 하는 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다. 정한영 경제부 정책팀 기자 c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