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월 독일의 짐머만은 주 워싱턴대사를 통해 멕시코 정부로 한장의 전문을 보냈다. 멕시코가 독일편에서 미국과 싸우면 텍사스 등 멕시코의 옛 영토를 양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통신은 영국 정보망의 손에 들어가 윌슨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급기야 미국의 1차대전 참가를 불렀다. 72년 6월 38대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워싱턴에서 5명의 남자가 민주당 선거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됐다. 재선된 닉슨 대통령을 끝내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었다. 도·감청은 이처럼 국가 안보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양면성을 갖는다. 때문에 도청은 중대한 범죄로 치부되고 감청 또한 적법성 여부에 대한 수많은 논란을 빚는데도 불구하고 갈수록 확산되고 기법 또한 다양하고 정교해진다. 98년 개봉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State)는 미국 국가안보국이 추진하는 도·감청 승인법안에 반대하는 하원 의원 살해현장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둘러싼 추격전을 중심으로 미국의 도·감청 실태를 보여줬다. 미국의 경우 실제 국가안보국에서 운영하는 통신감청시스템 에셜런을 통해 유·무선전화 팩스 e메일 등 지구상의 모든 통신을 감청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항은 물론 국제 상거래에 관련된 내용까지 파악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통신전쟁 시대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도청은 범죄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국회 정무위에서 국가정보원의 도청자료라며 이근영 금감위 위원장과 이귀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의 통화내용을 폭로한 것은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국가기관의 개인에 대한 도청 가능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황당하다. 가뜩이나 무분별한 감청이 늘어난다는 마당에 도청까지 행해진다는 건 소름 끼친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는 도·감청 방지용 비화기(秘話機)가 달린 휴대전화를 입수했다고도 한다. 정말 하늘 아래 자유로운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인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