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안방을 해외업체들에게 통째로 내줄 뻔 했구나" 나는 일본 출장을 갈 때마다 "휴"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본은 지난 95년 토종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업체가 미국기업에 매각된 후 시장을 급속히 잠식당했다. 지금은 외국 백신업체들이 천지다. 일본시장 공략을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를 때면 어김없이 5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지난 97년 6월,세계적인 백신회사인 맥아피가 실리콘밸리 본사를 방문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맥아피는 바이러스 백신인 "스캔"이란 제품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기업. 이미 일본 유일의 백신소프트웨어 회사인 "제이드"를 사들인 상황이었다. 초청을 받는 순간 어렴풋이 맥아피가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들의 초청에 응했다. 맥아피의 빌 라슨 회장은 실리콘밸리에서 한창 유명세를 타던 터라 미국 현지의 벤처기업인들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현관까지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회의장에는 안동 하회탈을 가져다 놓는 등 곳곳에서 각별히 신경을 쓴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한국의 작은 백신업체 사장을 위해 브리핑도 직접 하는 파격을 보여줬다. 브리핑 후 빌 라슨 회장은 의자를 끌어당겨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뚫어질 듯 내 눈을 응시하던 그는 마침내 운을 떼었다. "당신 회사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1천만달러를 지불하겠소.현금이든 주식이든 요구하는대로 주겠소" 단도직입적인 인수 제의도 놀라웠지만 제시금액이 더 놀라웠다. 1천만달러는 연 매출이 고작 10억원에 불과하던 우리 회사 입장에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다. 당시는 벤처열풍이 불기 전이어서 국내 벤처기업의 가치는 아주 미미했다. "1천만달러라.1천만달러...그 돈이면..." 수많은 갈등이 뇌리에 스쳐갔다. 1천만달러면 말그대로 "천만장자"가 되는 금액이다.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그것도 호화판 생활이 가능하지 않는가. 짧은 순간에 그토록 많은 고민을 해 본 것은 그 전에도,이후에도 없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 결단을 내렸다. "댁의 제안은 고맙지만 우리 회사는 팔 물건이 아니요" 그러자 오히려 그쪽이 화들짝 놀랐다. 얼굴에는 의아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 자리에서는 대충 둘러댔지만 그들의 목표가 한국 유일의 백신업체를 없애고 시장을 통째로 장악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인수 제의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맥아피에 회사를 넘긴 돈으로 요트를 2대씩이나 사들였던 일본백신업체 제이드의 사장까지 동원돼 "안 사장도 그 정도 돈이면 미국에서도 요트를 타면서 평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당시 안철수 연구소는 국내에서 유일한 바이러스 백신전문업체였다. 회사로 갓 자리를 잡는 단계라 매출은 적었지만 국내 바이러스 백신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위치와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던 맥아피로서는 우리 회사만 "제거"하면 국내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맥아피의 끈질긴 매각제의를 뿌리치기 위해 합작법인이라는 역제의를 냈다. 맥아피의 마케팅노하우와 안철수연구소의 기술력을 결합시킨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리측의 제의를 탐탐치 않게 여긴 맥아피측은 합작법인 대신 영업부문 제휴를 들고 나와 계약을 체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일방적으로 해지통고를 해왔다. "안철수연구소 제거"가 그들의 목표였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당시 협상을 제시했던 빌 라슨 회장은 회사 내분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맥아피에 회사를 매각했던 제이드의 사장 역시 일본 지사장 자리에서마저 쫓겨났으며 일본 백신시장은 해외업체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토종 백신업체들이 지키는 시장으로 남았다.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왜 뿌리쳤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의 결정과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돈이나 명예는 본질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한 후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일 뿐이다.중요한 판단을 할 때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러면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명확해진다." 정리=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