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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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정조대왕의 1795년 봄 화성(華城·현 수원) 나들이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릉원(縣陵園) 참배 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나섰던 이 행사의 면면을 글과 그림으로 상술한 이 책을 보면 행차를 구경하는 길가의 남녀노소 모두 머리에 뭔가 쓰고 있다.
19∼20세기초 이 땅을 찾은 서양사람들 또한 한결같이 조선을 '모자의 나라'로 표현했다.
앙리 갈리는 '극동전쟁'(1905)에서 '조선의 모자는 4천종에 달할 것'이라고 적었고,샤를 바라는 '투르 드 몽드'(1892)에 "조선은 모자의 왕국이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용도가 각각인 조선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이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조선조의 모자는 다양했다.
신분에 따라 차이난 건 물론 예복용과 일상용 의식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임금님이 쓰던 것만 해도 의식용인 면류관(冕旒冠),집무용인 원유관(遠遊冠),일상용인 익선관(翼善冠) 등으로 나눠져 있었고,문무관 및 선비용도 사모(紗帽) 갓(笠) 유건(儒巾) 전립(氈笠) 등 가지가지였다.
평민들도 초립 마미립 죽직립 등 여러 가지를 이용했고, 상중일 때는 굴건과 상립을 썼다.
하지만 서양인들을 그처럼 감탄시켰던 각양각색의 모자는 단발령 선포에 이은 서양문물 유입과 함께 급속히 사라졌다.
미국 선교사 부인 스텔라 벤손의 '천태만상'(1929)에 실린 삽화 '사라진 모자'는 전통 관모를 쓴 채 점잖게 걷는 중년은 점선, 중절모를 쓰고 가볍게 손을 흔드는 젊은이는 실선으로 표시함으로써 모자와 함께 바뀐 당시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다.
그래도 갓을 대신해 오랫동안 남성용 의관의 하나로 중시됐으나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췄던 중절모가 TV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다시 유행한다는 소식이다.
옛 모자왕국인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나라는 모자 수출 1위국이다.
의관을 갖추면 마음가짐도 달라진다고 한다.
옷이든 모자든 유행에 관계없이 때와 장소에 잘 맞게 써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