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독립선언서 작성에 가담한 이광수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에 간다. 상하이에서 그는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3·1 독립선언을 '차이나 프레스'와 '데일리 뉴스'에 보내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선다. 1920년에는 흥사단의 임시 반장이 되어 안창호 주요한 등과도 일하는데 이때 허영숙이 찾아와 잠시 임시 정부 내에 파문을 일으킨다. 두 사람은 1921년 5월 정식으로 결혼해 당수동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두 사람은 2남2녀의 자녀를 두지만 해방 뒤인 1946년 5월 이혼하게 된다. 종학원에서 철학과 윤리학을,경성학교와 경신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광수는 1922년 5월 갑자기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쇠퇴한 까닭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민족성을 개조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친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문단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개벽사는 사무실 집기가 파손되는 등 호된 곤욕을 치른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34년 조선일보 부사장까지 지내는 동안에 그는 '재생''마의 태자''단종 애사''흙'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어느 정도 회복한다. 그러나 1934년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두 번째 아내 허영숙과의 사이에서 태어난,그가 몹시도 사랑하던 일곱살배기 아들 봉근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게다가 수양동우회를 이끌던 도산 안창호의 장기 투옥은 그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1937년에는 이광수 자신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5년의 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나 이듬해 병 보석으로 풀려난다. 1939년 5월 몸을 추슬러 '세종 대왕'의 집필에 들어갈 무렵 그는 일제의 권유로 박영희 임학수 김동인과 함께 친일의 대열에 합류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문인보국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도쿄에 파견돼 조선 유학생을 상대로 학병 지원 권유 강연에도 나선다. 일찍이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때 문안을 기초하고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주필까지 지낸 춘원 이광수의 변절은 많은 사람에게 실망과 함께 분노와 배신감을 안긴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내가 조선신궁에 가서 절하고 가야마 미쓰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 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의 고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모호한 논리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데 그가 뼈저리게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1950년 태양신문에 장편 '서울'을 연재하던 도중 6·25를 맞는데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한 그는 7월12일 인민군에 의해 납북된다. 이광수가 북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려진다. 강계에서 30여㎞ 떨어진 산악지대의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그는 병약한 몸에 심한 동상까지 걸린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나중에 북한 부총리까지 지내는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25일 숨을 거둔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