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감격과 술렁임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1월1일. 25세의 한 젊은이가 인천 해안동 모퉁이에 운송회사를 차렸다. 트럭은 고작 1대.회사이름은 한진상사였다. 작지만 당찬 몸집과 강렬한 눈빛을 가졌던 이 청년이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막강 운송재벌로 성장할 줄은 당시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주인공은 고(故) 조중훈 한진 회장. 조 회장은 10대 후반에 휘문고보를 다니다 돈을 벌겠다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후지나가다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수송선인 헤이안마루호를 타고 중국과 홍콩 등지를 다니며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1942년 귀국한 그는 서울 효제동에 보링 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일제의 기업정비령으로 곧 문을 닫고 말았다. 조 회장이 화물사업에 손을 대게 된 계기는 해방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화물량이 늘어나고 있는데 착안한 것이었다. 서울 영등포∼인천간 카바이트 총 대리점을 맡은 그는 차츰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수송 분야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황제 자리를 놓치지 않은 한진그룹의 역사적인 첫 걸음이기도 했다. 2년 뒤인 1947년 한진상사는 15대의 화물 트럭을 보유하면서 경기도 일원의 화물운송업 면허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직전에는 30대의 화물 자동차를 비롯 정비공장 대리점망까지 갖춘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후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한진상사는 계열사 21개, 총 매출액 15조2천억원에 3만3천5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한진그룹의 모체가 됐다. 조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보유하고 있던 트럭을 모두 징발당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전쟁 덕을 보기도 했다. 조 회장은 1956년 11월 주한 미8군 구매처와 군화물 수송계약을 체결하면서 다시 성장 기반을 마련했고 미군 고위장성들과 교분도 쌓게 된다. 한진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던 1966년 주월미군 구매처와 하역 및 수송계약도 체결했다. 5년간 1억5천만달러 규모로 성사된 이 계약은 조 회장이 국내 굴지의 기업인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조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계열사 확장에 본격 나섰다. 19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세우고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에 5억7천만원을 주고 동양화재해상을 인수했다. 이어 1969년에는 공기업이었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오늘날의 대한항공으로 키웠다. 그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인수 요청을 받고 나서 국익차원에서 국적항공사 설립을 결심했다. 육해공 삼위 일체를 이루겠다는 원대한 구상도 이 시기에 마련됐다. 대한항공 출범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자금이 투입됐고 기존 종업원들과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조 회장은 민영화 첫해에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하고 1970년대초에는 미주노선을 개설해 호놀룰루에 '태극 날개'를 안착시켰다. 1972년에는 흑자를 달성해 배당도 실시했다. 항공사업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뒤 조 회장은 해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운해운을 설립해 '오대호' 한 척으로 미국 서부항로 운항을 시작했다. 1977년 5월엔 컨테이너선 위주의 대형해운회사를 세우기로 마음먹고 한진해운을 출범시켰다. 정부로부터 부실해운사인 대한선주 인수를 제의받고 한진해운과 합병을 결정했다. 그의 결심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진해운이 세계 4대 선사로 발돋움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중공업 부문 진출 방식 역시 항공 해운부문과 닮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사인 조선공사가 1987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노후 선박이 많아 고민하던 조 회장은 조선공사 입찰에 뛰어들어 8백62억원의 가격으로 이 회사를 인수했다. 조 회장은 물류혁신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진은 1969년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컨테이너 운송방식을 도입,운송업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같은해 인천항에 한진 컨테이너 터미널을 착공, 1974년부터 국내에 민자부두 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조 회장은 이처럼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듭했고 부실회사들을 인수해 되살리는 솜씨도 놀라웠다. 스스로 경영을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표현하듯이 조 회장은 경영 주변의 흐름을 면밀하게 살피며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잘 가렸다. 단지 돈과 땀만으로 승부했다면 오늘날 육해공을 아우르는 한진그룹의 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역경을 견뎌내며 항공 해운 부문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군 조 회장이야말로 고독한 결단의 승부사였고 현장의 살아있는 카리스마였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