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의 하나인 무디스가 지난 15일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으로 상향 조정했다. 'A3'(A- 상당)인 한국의 신용등급을 수개월 내 올릴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경제'를 최대 치적으로 여기는 김대중 정부로선 또 하나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꼭 5년 전인 지난 97년 11월21일, 국제 금융불안의 회오리 속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투기등급으로까지 곤두박질쳤던 한국의 국가경제 신인도가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되찾아가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가 더이상 나빠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다. 그만큼 DJ의 경제철학(DJ 노믹스)을 펴기 좋은 환경이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모토로 내건 'DJ 노믹스'는 "곳간이 비었다"며 다급하게 외치던 5년 전 국가부도 직전 상황에 견줘 외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 명분은 시장복원, 수단은 반(反)시장적 그러나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취한 각종 초법적인 조치들은 '명분과 현실' '원칙과 수단' 사이에서 정부의 딜레마를 여실히 드러냈다. '무너진 시장을 복원한다'는 명분이 국민적 호응을 얻었지만 그 수단은 매우 '반시장적'이었다는 얘기다. 초법적인 대응에 맛들인 정부는 시장원리가 작동하고 경제가 굴러가기 시작한 뒤에도 여전히 행정만능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 4대 부문 구조개혁은 다분히 초법적인 규제조치들을 내포하고 있다. 집권 초기에 밀어붙인 대기업간 '빅딜(대규모 사업교환)'과 일률적인 부채비율 2백% 이하 감축조치 등이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이형만 자유기업원 부원장은 "민간의 역할을 키우는 것이 시장경제의 요체인데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부 역할을 키워버린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들은 '금 모으기'의 심정으로 위기 극복을 위해 이같은 조치들을 일단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IMF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강요한 각종 조치를 거부하기 어려웠다는 옹호론도 만만찮다. ◆ 행정만능의 관성 DJ노믹스가 어떤 법규에 근거했느냐는 적법성 논란은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선(先) 조치, 후(後) 입법' 사례도 많다. 공식 문건을 거의 남기지 않은 정부 처리과정을 보면 결코 시장친화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경제관료들이 '입'으로 조정하고 관철시켰다는 얘기다. 이같은 강공책은 하이닉스반도체 현투증권처럼 풀기 어려운 숙제도 남겼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경제위기라는 특수 상황이 고려돼야 하지만 기업과 시장에 맡겨야 할 과제까지 정부가 너무 깊숙이 개입해 왔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방지라는 명분 아래 출자총액 제한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는 기업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가로막아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때문에 정부의 대기업관(觀)이 '성악설(性惡說)'을 깔고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도 사고 있다. ◆ 시장규율과 규제 혼동 대부업법을 개정해 도입한 이자상한제도 마찬가지다. 사채의 부작용이 크지만 "시장가격(이자)을 행정력으로 규제하려는 발상이 규제 이전보다 더 큰 위험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줄을 잇고 있다. 최근 은행들에 담보 인정비율을 낮추도록 하는 등 잇달아 내놓고 있는 가계대출 억제대책도 '관치(官治)'의 냄새가 물씬 난다. 양도세율의 대폭 인상 등 세제를 동원한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역시 시장규율이 아니라 가격과 행정지도로 문제를 틀어막으려는 시도로 분석되고 있다. 김주현 현대경제연구원 부원장은 "발전노조 파업, 가스산업 구조개편 연기, 철도 민영화 실패 등으로 나타난 공기업 구조조정과 노사정책 등을 보면 시장경제 원리가 제대로 작용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