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당국은 급증하는 가계대출을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위험수위에 접근하는 가계부채가 부실화될 경우 IMF 금융위기가 재발할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가계대출에 대한 대손충당금비율을 올리고 주택담보 대출한도를 낮추었다. 이번에 내놓은 은행권 연대보증 한도축소방안도 가계대출 억제조치의 일환인 듯 하다. 내년부터 개인의 제3자에 대한 은행빚 보증한도는 은행당 5천만원으로 제한된다. 또 1인당 연대보증 한도도 '대출 건별'로 되어 있던 것을 '채무자별로' 1천만∼2천만원으로 제한함으로써 분할보증에 의한 한도 확대를 막는다. 이런 조치가 가계대출을 억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차입자와 금융회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해소하고,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인 '금융연좌제'라고 할 수 있는 연대보증제도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친척이나 친지간에 가장 꺼리는 것 중 하나가 남의 빚 보증 서는 일이다. 사람이야 양심 바르고 착실하더라도 사업이 부진하거나 불의의 사고가 나서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보증인이 변제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증을 부탁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결국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거절하는 것도 괴롭기 짝이 없다. 아마 빚보증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수요를 억제하고,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는 신용선별 효과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은행이 왜 스스로 자기책임 아래 신용선별을 하지 않고,안이하게 담보나 연대보증을 세워 위험을 제3자에게 떠넘기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대출관행은 은행이 기본적으로 존재이유인 대출심사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은행은 보증인만 세우면 신용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돈을 쉽게 빌려주고,차입자도 자기 능력 이상으로 돈을 빌림으로써 도덕적 해이가 생긴다. 신용불량 사고가 빈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전당포 같은 금융관행'은 금융산업발전에 저해요인이 되며,그 결과 취약한 금융산업이 IMF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었다고 본다. 주요 선진국에선 우리 은행들처럼 담보대출이나 연대보증에 의존하는 금융회사는 거의 없다. 은행은 대출신청자의 신용 및 사업성,상환능력 등을 분석해 신용공여한도를 미리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돈을 빌려준다. 담보나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며 대부분 신용대출을 원칙으로 한다. 이에 따라 은행은 여신심사 및 위험관리 기능을 강화하고,차입자도 항상 자신의 신용도를 높게 유지하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이것이 신용사회를 이룩하고 금융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이다. 우리 은행도 담보대출이나 연대보증보다 신용대출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은행은 차입자가 사망하면 연대보증인에게 빚을 갚도록 해 빚상속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과거에는 은행의 공공성을 터무니 없이 강조한 반면 은행은 지나치게 보호를 받았다. 채권자들 중에도 은행은 항상 제1순위로 채권을 보호받았다. 담보나 보증을 요구하는 관행도 안이한 채권확보를 위한 목적이었다. 과거에 대출금리가 일률적으로 고정되었던 것도 충분한 채권확보만 되면 차등금리를 적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용조사나 여신심사도 사실상 불필요했다. 은행은 그냥 연대보증만 세우고 자금을 배금 할당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은행은 차입자에 비해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갖는다. 모든 위험을 보증인이나 차입자에게 떠넘길 수 있다. 금융시장에서 은행과 차입자간에는 도저히 공정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러한 금융환경이 은행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고 본다. IMF 외환위기 이후 수 많은 은행,점포 및 인력이 퇴출됐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도 깨졌다. 이제 은행이라고 해서 특별히 보호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은행도 상업성을 추구하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생존의 조건이다. 신용관리의 사각지대에서 담보나 보증으로 안이하게 채권을 확보할 수는 없으며,본연의 여신심사 기능을 강화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금융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해소하고 신용사회를 확립해야 한다. clee@skk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