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미가 보일 즈음이라는 소설(小雪.22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첫눈은 오래전에 내려 기억이 가물거리고, 골짜기 바위틈새에 뻗어내린 고드름도 점점 더 굵어지고 있다. 나날이 기세를 더해가고 있는 손돌바람의 매운 맛까지 훨씬 빨리 계절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금방이라도 큰 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하늘이, 미처 피지도 못하고 와르르 떨어진 오색단풍 자리를 꿰차고 앉은지 이미 오래다. 그게 즐거워 스키장을 찾아 나선 이들과는 반대로 길을 떠난다.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반도형 국립공원인 변산반도는 산과 바다의 겨울색을 한아름 담아올수 있어 좋은 가족나들이 명소다. 변산나들이의 1번지는 내소사. 휑하니 뚫린 듯 하면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자세가, 왕벚꽃 화려한 봄의 풍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안겨주는 작은 절집이다.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라는 승려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원래는 큰 절(대소래사), 작은 절(소소래사)이 있었는데 큰 절은 불이 나 없어지고 작은 절만 남아 있다. 18세기 초 내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에 머물러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검붉게 익어 먹음직스런 곶감꼬치를 파는 아주머니의 질박한 미소를 뒤로 하고, 일주문 너머로 들어선다. 천왕문 못미쳐까지 길이 6백m쯤의 전나무숲길이 이어져 있다. 사계절 변치 않는 푸르름 사이로 마지막 애기단풍이 절묘하게 어울려 있다. 부드러운 흙길 한쪽에는 바싹 마른 낙엽이 나들이객을 반긴다. 직소폭포를 지나는 내변산 산행을 마친 이들이 그 푹신한 발걸음을 즐긴다. 아이들은 주체할수 없다는 듯 에너지를 내뿜으며 뜀뛰기 시합을 한다. 빠르게 앞서가는 아이들의 등뒤에서 이는 전나무의 싱그런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전나무숲길 너머 발가벗은 왕벚나무길 앞으로 천왕문이 보인다. 1천살된 느티나무가 내소사의 연륜을 대변한다. 허리를 굽혀 봉래루를 지나 대웅전과 마주한다. 대웅전은 그렇게 수수할수 없다. 화장하지 않은 양반가 셋째 딸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고 기둥이며 들보를 얹어 올렸다는 대웅전은 창살문양으로도 유명하다. 연꽃과 국화 등의 서로 다른 문양에는 절대자를 향한 작은 인간들의 기원이 배어 있는 것 같다. 내소사에서 나와 30번 국도를 탄다. 뻘이 드러난 서해의 겨울느낌을 만끽할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다. 그 중간, 변산반도의 서쪽끝에 채석강이 있다. 채석강은 손때가 묻은 책을 층층이 쌓아 놓은 것 같은 해식단애. 중국의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빼닮았다는 곳이다. 자연의 신비를 보여주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꼭 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해넘이를 기다리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이 예쁘다. 채석강 바로 옆은 적벽강. 붉은 색 절벽과 암반이 2km 정도 펼쳐진 적벽강은 중국의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적벽강과 비슷하다고 해 이름붙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젓갈시장으로 붐비는 곰소포를 지나 23번 국도를 따른다. 길 왼편 개암죽염 간판을 보고 들어서면 개암사에 닿는다. 원래 변한의 왕궁터였던 이 절집 역시 내소사에 못지 않은 단아함을 자랑한다. 일부러 뒷산 꼭대기에 올려 놓은 듯한 울금바위와 어울린 대웅전은 내소사의 그것 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나들이의 끝은 원숭이학교. 폐교를 개조해 지난 7월 문을 연 원숭이학교는 가족나들이 명소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아이들은 특히 원숭이 공연을 좋아할 것 같다. 원숭이들이 실내공연장 무대에 올라 재주를 부리고, 코흘리개 초등학생처럼 수업 받는 모습을 연출해 웃음을 자아낸다. 예전에 한 TV오락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일본 닛코원숭이학교와 비슷하다. 원숭이학교에는 또 갖가지 보석원석과 화석류가 전시된 자연사박물관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하는 변산나들이의 마침표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부안=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