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컴퓨터그래픽 디자인 업체는 최근 국내 디자인업체인 A사에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 특수영상제작 기술을 이전해 줄테니 6개월 안에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A사는 이 요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인력과 장비로는 작품을 완성하는데 최소 2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이 A사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국내에선 그래픽 디자이너를 비롯 한해 3만명의 디자인 인력이 배출되고 있다. 디자인 전문회사만도 8백여개에 이른다. 양적으로는 이미 공급과잉 상태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영세 하청업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디자인 경쟁력은 선진국 대비 60∼70% 수준으로 경쟁국인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도 뒤지고 있다.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가전, 이동통신분야의 디자인조차 3년안에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 디지털시대에 맞는 디자인 정책이 없다 =디지털 디자인분야의 경쟁력이 뒤처지는 요인으로는 우선 정부의 통합적인 디자인 정책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정부의 디자인 관련 업무는 산업자원부 문화관광부 과학기술부 교육인적자원부 등으로 분산돼 있어 관련 부처간 정책조율이 쉽지 않은 상태다. 특히 디지털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정보통신부의 경우 디자인 분야를 외면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그나마 강점을 갖고 있는 디지털분야의 경쟁력도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디자인 관련 법체제가 정비돼 있지 않는 것도 문제다. 산업디자인진흥법과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으며 기금 조성에 관한 규정도 제각각이다. ◆ 엔지니어링과의 연계가 부족하다 =기업측은 대학의 디자인 교육이 단순 미술실기 위주로 돼 있어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 관련 분야와의 연계가 약하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산업디자인 관련학과의 80% 이상이 예.체능대학에 소속돼있어 공학지식을 갖춘 디자이너를 배출하는데 한계가 있다. 디자인 관련학과가 공과대에 소속돼 있어 인간공학 엔지니어링 등 실무위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 유럽 등과는 판이하다. 이에 따라 대학출신 디자이너라고 해도 최소 6개월에서 3년까지 재교육을 받아야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 디자인정책을 다룰 국가기구 만들어야 =디자인 경쟁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문화관광부 등의 디자인진흥 업무를 통합.조정하는 기능이 필요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울산업대 공업디자인학과 우흥룡 교수는 "디자인 관련 부처들이 유기적으로 협조될 수 있도록 총리실 산하에 디자인청이나 디자인문화원, 국가디자인진흥위원회 등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디지털디자인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전문가들은 한국이 강점을 갖춘 디지털가전디자인, 디지털콘텐츠디자인 등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선 디지털 디자인으로 특성화된 집적단지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가전 디자인쪽에선 삼성전자 LG전자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포진해 있어 한국은 디지털 가전의 디자인 중심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콘텐츠디자인 분야다. 독자적인 브랜드의 디자인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가전분야와 달리 디지털콘텐츠분야는 선진국의 하청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디자인법인단체총연합회 김광현 회장은 "최근 인기를 끈 영화 '스파이더맨'에서만 벌어들인 수입이 현대자동차의 1년 매출보다 많다"며 "디지털콘텐츠 분야에 대한 정부의 통합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송대섭 기자 strong-korea@hankyung.com [ 협찬 : 삼성 포스코 산업기술평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