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작고 긴 것이 그립다 .. 韓水山 <소설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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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이 너무 없구나.
긴 것들이 너무 보이지 않는구나.
그런 마음으로 11월을 보냈다.
옷 속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 어느새 한해가 가고 있음을 본다.
2002년을 맞으며 '올해가 우리 민족사에 아주 중요한 한해가 되지 않을까'하는 예감을 했었다.
너무나 버겁고 많은 국가대사를 앞에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함께 치러야 하는 2002 월드컵에 부산아시안게임, 지자체선거와 재.보선, 그리고 연말의 대선, 요동칠 것이 예상되던 남북관계, 어렵기만 한 대내외 경제여건….
어느 것 하나 마음놓을 것 없는 한해였다.
그 한해가 이제 가고 있다.
출렁거리는 격랑을 헤치듯 살아온 한해였는데, 거기에 우리들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작은 것'과 '긴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이 허전하게 남는다.
10여년 전이었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에서 극세공의 보물들을 본 적이 있다.
공안에 또 공을 파고 또 공을 파놓아, 도대체 몇개의 공이 공 속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옥돌 작품이 있었다.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의 술병과 술잔까지 손가락만한 상아에 파놓고 있는 그런 조각도 있었다.
한숨을 쉬면서 확대경으로 그 보물을, 허무를 바라보았었다.
어떤 것은 대를 물려가며 백여년만에 완성한 것도 있었다.
대를 물려가며 상아에 배를 새긴 사람들.
왜 무엇을 위해서 이 사람은 겨우 손가락만한 상아를 파면서 무위의 한평생을 보냈단 말인가.
뭔가 긴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 범인들의 눈에는 허무하게까지 보이는 그런 집념어린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일까.
국가경영의 막중함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조차 어제의 말이 오늘과 다르고, 그때의 일을 지금 모른다고 한다.
그런 잡다함만이 우리들에게 가득하다는 아쉬움, 바로 '긴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대선 출마를 한 어느 후보의 정책을 살펴보아도, '나는 긴 세월의 한 부분을 맡아 밑그림을 그리고 가겠습니다. 마무리는 다음분이 이룩해 주십시오' 하는 긴 안목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것을 자기가 뚝딱뚝딱 해내겠다는 식이다.
'작은 것'에 대한 절실함도 남는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의 군화 위를 기어오르는 개미가 있다고 하자.
그 거대한 가죽 덩어리가 죽어 가는 병사의 신발이라는 걸 개미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쓴 '적과 흑'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개미가 병사의 군화가 갖는 깊은 의미를 짐작할 수 없듯이, 우리도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내일 무엇이 올지를 모른다.
올 한해 나는 늘 '쪼그리고 앉아야 개미가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다.
뛰어가는 사람에게 땅 위를 기어가고 있는 개미가 보일리 없다.
너무 빠르고 너무 큰 것에만 가치의 줄자를 대다 보니, 우리들은 작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진정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태어나서 자란 그의 고향, 독일의 조그마한 한촌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나는 오래 가슴 설레며, '사람은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을'하며 탄식처럼 중얼거렸었다.
이렇게 한적하고 고요하고 우아한 거리를 천천히 거닐면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나를 비우지도, 채우지도 못한 채 서울의 혼잡스러움 만큼이나 혼잡한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제대로 한번 물어볼 사이도 없이, 바쁘고 빠르게 뒤엉킨 약속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하루를 맞는다.
개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는 여유와 진정함 속에서만 찾아진다.
빠르게 앞으로만 뛰어가면서 크고 잘난 사자와 코끼리만을 보겠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평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하고, 지나쳐 버리게 하는지를 왜 우리는 잊고 있는 것일까.
사회 곳곳에 여전히 그늘진 곳은 그늘진 채로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가리며 번드르르한 현수막과 가건물만이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본다.
사회의 큰 틀이 그렇게만 굴러가다 보니 사람들의 가슴에는 억울함이 남는다.
나도 억울하고 너도 억울하다.
또 한해를 '너무 빠르게, 너무 큰 것만을 바라보면서 뛰어온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남아 있는 한해의 마무리를 바라본다.
< azaz9829@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