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파산제도의 법적 틈새를 이용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룸살롱에서 술먹고, 명품 사 모으다 망한 사람도 '적당히 핑계대고 파산을 신청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잘못된 인식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될 우려가 있다"(서울지법 파산부 관계자)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파산 신청자가 빚을 전액 또는 일부 탕감받을 수 있는 '면책 조항'을 더욱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어 '법이 무책임한 낭비를 부추기는 꼴'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악용되는 파산제도 올해초 파산신청을 한 강모씨(24.여)의 빚은 모두 9천8백만원이었다.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면서 한달에 1백만원을 버는 강씨의 빚이 늘어난 것은 무분별한 카드 사용 때문이었다. 법원은 강씨가 명품이나 보석을 구입하면서 파산에 몰렸다는 '심증'에도 불구, 이를 확인할 '물증'이 없는데다 직권조사를 할 권한도 없어 '면책'을 선고했다. '친척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했고 부모님의 병원비를 카드로 계산했기 때문'이라는 강씨의 주장을 뒤집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의 주부인 이 모씨는 경륜으로 2억원을 날리고 파산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씨는 면책받지 못했다. 신고 당시 이씨의 파산 명분은 '가족관계'였지만 법원의 끈질긴 추궁 끝에 경륜으로 돈을 날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 모씨(27)는 지난 99년부터 명품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매달 수백만원을 소비하고 이를 10여개의 카드로 돌려막던 김씨는 결국 카드회사의 전화독촉 때문에 직장마저 그만둬야 했다. 모두 1억4천만원의 빚을 진 그는 최근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법원은 파산 신청자의 상당수가 과소비와 도박 등으로 빚을 지고는 카드 돌려막기 등으로 버틴 끝에 두손을 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악질 채무자들은 서울지방법원의 면책 비율이 높다는 점을 이용해 서울로 주소지를 옮기고 파산신청을 하는 사례도 있다고 법원 관계자는 전했다. ◆ 손발 묶인 법원 이처럼 법의 오.남용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면책 불허가 조항에 해당하지 않으면 무조건 허가'하게 돼 있는 현행 법규 때문이라는게 법조계와 금융권의 지적이다. 카드회사 등 채권자들이 이의제출 기간때 '채무자는 백화점에서 명품을 사다 빚더미에 올랐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법원이 이에 근거해 면책을 불허할 수 있지만 실제 카드사들이 이의를 신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드사들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확인 비용에 비해 회수할 수 있는 채권액이 적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면책 조항이 내년 7월 시행 예정인 통합도산법 시안에서는 더 완화되는 내용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산법 시안은 낭비적 요소에 해당하는 면책규정마저 삭제하고 면책대상의 범위를 급여소득자 및 자영업자 뿐 아니라 임대소득자로까지 확대함으로써 파산절차 악용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는게 법원의 판단이다. 임대소득자들이 파산신청을 하고 매달 들어오는 임대료를 낮게 신고해 책임을 피해나가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거의 없다는 것. 지금도 도박을 하거나 명품을 산 것을 법원이 발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마저 면책 불허가 조항에서 삭제할 경우 도덕적 해이는 극치에 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서울지법 윤강열 판사는 "개인파산제도가 채무자의 갱생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면책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그러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서는 과소비 등 중대한 낭비행위에 대한 견제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용준.오상헌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