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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블.위성 하이라이트] (23일) 'Now In Korea'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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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w In Korea(아리랑TV 오전 10시)=다양한 한지 공예를 비롯한 닥종이공예의 세계를 소개한다. 1천년 동안 변질되지 않는 한지는 그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한 때 수요가 없어 업계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요즘은 오색한지의 개발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질 좋은 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간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디스커버리채널 오후 8시)='점보트럭' 편. 캘리포니아 경찰들로 이루어진 로드래그팀은 오토바이선수들로 구성된 고스트 마운틴 라이더팀을 상대로 점보 트럭을 만드는 시합을 벌인다. 커다란 트럭을 제 시간 안에 만들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차 위를 문제없이 지나가야 한다. 로드래그팀은 농업용 타이어를 사용하고 라이더팀은 더 작은 트럭 타이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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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침의 지휘자] 英 음악을 주류로 만든 핀란드 거장

      사카리 오라모(1965~·사진)는 영국 BBC 심포니 수석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핀란드 지휘자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 악장으로 활동하던 중 1989년 핀란드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지휘 거장 요르마 파눌라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93년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에서 지휘를 맡으며 지휘자의 길을 걸었다.오라모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1년간 영국 버밍엄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았다. BBC 심포니와는 2011년 객원 지휘자로서 연을 쌓았다. 2012년 이 악단 수석지휘자로 임명된 뒤 계약 기간이 늘어나 2030년까지 BBC 심포니를 이끌기로 했다. 내년 3월 이 악단과 내한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협연한다. 오라모는 존 폴즈, 구스타브 홀스트 등 영국의 20세기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영국 음악을 유럽의 주류로 올려놓는 데 일조했다.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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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말이 되지 않는다(Life doesn’t make sense).”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영화를 만들어 ‘오컬트의 제왕’으로 불린 데이비드 린치 감독(1946~2025)이 자주 하던 말이다. 그것은 예술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생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모든 인과관계가 명확하다면 태초에 예술이라는 게 존재했을까. 린치의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상 속에서 낯선 것과 기이한 것들을 기꺼이 낚아 올리라는 메시지였다. 글과 그림이, 영화와 연극과 문학이 왜 세월을 거슬러 영원히 살아남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올해도 수많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공백과 혼돈이 뒤엉킨 세상, 그 속에서 사유와 울림을 줬던 이들이다. 2025년의 끝자락,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별들이 남긴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그들은 싸웠다. “문학은 영구적인 반란의 형태”라고 말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리오 바르가스요사, “시시포스처럼, 평생 불가능한 문학의 꿈을 꿨다”던 소설가 서정인, 그리고 “과거를 배우되 결코 머무르지 말라”며 기존 건축계의 문법에 끊임없이 도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이들의 영혼엔 규칙을 깨는 단단한 용기가 숨어 있었다. “다 이상한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개념”이라던 배우 다이앤 키튼, “(여배우는) 일류가 돼야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한 배우 김지미. 뉴 할리우드 시네마의 상징이자 영화계를 위해 헌신한 로버트 레드퍼드는 아예 이런 말을 남겼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위험이다”라고.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우리가 영원히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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