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미년 새해에 김승유 하나은행장과 이영남 여성벤처협회장이 하나은행 본점에서 만났다. 첫 대면이라 어색해할 것이라는 예상은 찻잔이 놓이기도 전에 어긋났다. "휴렛팩커드는 창고에서 시작했어요. 반면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입구에서부터 첨단 디자인으로 쫙 깔아놨어요. 이건 아닙니다. 벤처기업들의 기본자세가 이래선 안돼요." "기업 사정을 제대로 분석해 보지도 않고 잘못된 잣대로 단기자금을 전부 회수해 버리는 은행도 있어요. 돈이 많을 땐 제발 갚지 말라던 사람들이에요." 금융권과 벤처업계의 문제점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 비판이 쏟아졌다. ----------------------------------------------------------------- 이영남 회장 =여성기업인 한 분이 대출 받으러 은행에 갔는데 "남편이 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더래요. 이런 차별대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기업인들에게 특혜를 달라는게 아닙니다.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라는 겁니다. 김승유 행장 =남성 위주의 경영풍토는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외국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당장 디스크리미네이션(discrimination.차별) 법에 걸려 문제가 됐을 겁니다. 국내 은행들도 지난 3~4년 사이 급속히 변하고 있습니다. 사업성 중심의 여신판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금운용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은행 경영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에 우량 거래선을 최대한 잡으려고 합니다. 이 회장 =은행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 자신이 망할 위기에 있을 때 은행의 신용(지원) 하나로 다시 시작했거든요.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연쇄부도 위기에 몰렸었죠. 그 때 은행을 찾아가 "첫째로 내 근로자들을 모두 지켜 달라. 둘째로 내가 가진 것 다 가져가도 좋으니 회사의 연속성을 유지해 달라. 새 경영자를 써도 좋다"고 얘기했더니 은행에서 도와 주더군요. 그렇게 회사를 회생시켰습니다. 반면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전 상의도 없이 다짜고짜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몇달 뒤에 1천2백만달러를 갚아야 할 게 있었는데 그걸 못갚을 거라고 봤나봐요. 기업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6개월을 내다보고 자금운용을 하는데 그걸 못믿어요. 돈이 많을 때는 갚겠다고 해도 계속 써 달라고 사정하던 사람들이 잘못된 잣대 하나만 쥐고 그러고들 있어요. 너무 단기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업과 공생하는 문화를 길러야 합니다. 김 행장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은행 서비스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데 그쳤습니다. 이제는 한 단계 발전해야 합니다. 돈만 빌려주는게 아니라 경영자문서비스 등 서로 정보까지도 주는 단계로 가야 합니다. 은행과 기업은 신뢰관계를 구축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흔히들 은행을 두고 "비 오면 쓰고 있는 우산까지 뺏어가고 맑은 날엔 두 개씩이나 갖다 준다"고 하잖아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모르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은행들도 평소 자기 거래선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판단하고 선의의 충고도 할 수 있는 동반자 관계가 돼야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이나 벤처캐피털 같은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이 회장 =금융시장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벤처기업이 코스닥등록을 한다고 하면 그 때부터 작전세력들이 달라붙습니다. 저는 벤처기업인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주가를 올리려다 보니까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겁니다. 벤처기업인들도 그 결과가 얼마나 처절한지를 경험했습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 두개 회사가 문제 됐다고 해서 모든 회사를 백안시하지는 말아 달라는 겁니다. 회사를 찾아와서 조금만 들춰보면 제대로 된 회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괜히 잘하고 있는 기업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선 안됩니다. 좀 더 전문화된 서비스와 지식을 갖고 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형태로 나가야 합니다. 또 콘텐츠사업이나 게임.문화사업, 지식서비스업 등 여성에게 맞는 비즈니스 모델이 매우 많습니다. 여성기업인을 차별하는 문화는 청산돼야 합니다. 김 행장 =그런 산업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거에 테헤란로를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했는데 저는 처음부터 못마땅했습니다. 휴렛팩커드는 창고에서 시작했어요. 반면 우리나라 벤처기업은 입구에서부터 첨단디자인으로 쫙 깔아놨어요. 이건 아닙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고유영역, 핵심 경쟁력에 투자해야지 포장만 잘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행도 벤처기업에 대한 분석능력을 길러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외국 은행들은 자체 분석요원을 두고 있지만 사회적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전문 분야별로 연구소가 있어서 용역만 주면 보고서가 즉각 나오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 회장 =벤처기업들의 오류는 일종의 학습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호되게 매를 맞았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사실 테헤란로에 벤처기업들이 들어간 것은 벤처캐피털 등 자금줄이 거기 몰렸기 때문이지 벤처기업인들이 굳이 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김 행장 =새해 경제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려보죠. 한국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여서 따로 놓고 봐서는 안됩니다. 아쉽게도 올해 세계경제 전망이 밝지 않습니다. 또 이라크문제 등 불확실성이 많습니다. 연구기관들은 5~6% 성장을 예상하는데 저는 5% 안팎으로 전망합니다. 내수는 둔화되고 건설경기는 작년같지 않지만 점진적인 성장을 보일 것입니다. 주택가격은 안정되거나 경우에 따라선 하락할 것입니다. 집값 떨어지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집값은 당연히 떨어져야죠. 의식주와 관련된 것에 투기적 요소를 개입시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정부가 잘못한 겁니다. 이 회장 =동감입니다. 다만 기업인으로서 체감하기론 상황이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하반기부터는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늘어나면서 다소 호전될 것 같습니다. 김 행장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입니다. 시장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통하는 곳이기 때문에 진정한 공정경쟁을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가장 관심을 갖는게 독과점문제 아닙니까. 또 확실성을 많이 보여주는게 좋습니다. 미리 예시해 주고 사전에 알려줘야 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투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회장 =새 정부는 전략적인 개혁을 했으면 합니다. 무조건 바꾸자는 막무가내식 개혁이 아니라 전략적 사고 아래 장기적인 틀에 맞춰 바꿔 나가는 혁신이 필요합니다. 기업활동을 하다보면 규제가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벤처사업가는 "다같이 해외로 나가자"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업을 못할 지경인데 해외기업들이 들어오겠습니까. 말로만 '동북아 허브' 운운하지 말고 기업이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김 행장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기업인들이 모이는 곳에 은행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협회든 어디든 직원을 보내서 정보도 교환하고 어려움을 같이 해결했으면 합니다. 이 회장 =이제는 베스트(best)가 아닌 퍼스트(first)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다가 아니라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들겠습니다. ----------------------------------------------------------------- < 김승유 행장 약력 > - 1943년 서울 출생 - 경기고, 고려대 상대 졸업 - 73~79년 고려대 경영대학원 강사 - 76~80년 한국투자금융 증권부장, 영업부장 - 80~91년 한국투자금융 부사장, 상무, 전무 - 91년 하나은행 전무 - 97년 하나은행장 - 2002년 통합 하나은행(하나+서울은행) 행장 < 이영남 회장 약력 > - 1957년 부산출생 - 부산동여자고, 동부산대 졸업 - 81~84년 광덕물산 근무 - 88년 서현전자 설립 - 96년 서현전자 대표이사 취임 - 현재 이지디지털(옛 서현전자) 대표이사 - 2000년 벤처기업대상 철탑산업훈장 - 2001년 한국여성벤처협회장 취임 정리=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