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의 재벌정책 향방에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간부의 개인적인 의견을 언론이 예단해 보도하고,재계가 민감하게 반응했던 최근의 사건은 이러한 조바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라고 보인다. IMF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5+3원칙에 따라 재벌개혁정책을 추진해왔으며,그 핵심은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 도입이 중심이 된 지배구조 개혁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가족지배형 지배구조를 영미식의 시장중심형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구조 형태는 기업의 경영성과와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선택돼야지 지배구조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 비록 사기업이지만 권력의 배분방식을 제3자가 임의로 정한다는 것은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주주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지배적 현상인 강력한 소유경영체제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문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 기업들의 소유경영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를 전면 부인해서는 안된다. 우리 기업들도 최고의 전문경영자집단과 선진화된 기업지배구조를 구축하지 않고는 세계화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배대주주가 없는 대규모 금융회사,민영화된 공기업 및 선진국의 자본이 투자된 세계적 규모의 대기업들은 엄격한 영미식 기업지배구조의 전면적인 도입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상당한 규모의 대기업까지는 강력한 기업가정신이 바탕이 된 지배대주주 CEO 중심의 경영시스템이 더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다만 경영의 투명성 확보는 어느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대상이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어 경영성과가 떨어지고 경영의 투명성이 훼손되는 경우에는 시장(기관투자가와 금융회사)이 이를 엄격히 평가하고 응징해야 한다. 그래서 대기업 지배구조의 개혁에는 금융회사와 기관투자가들의 지배구조 개혁이 선결조건이다. 우리나라의 경험을 되돌아 보자.전문경영자에 의한 책임경영체제를 실천하고,대주주는 후원자이자 공정한 평가자 및 감시자의 역할에 머물렀던 재벌들은 IMF 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했던 반면,총수가 경영의사결정을 독점했던 재벌은 대거 무너져 30대 재벌 중 14개가 탈락했다. 능력 없는 대주주나 그 가족ㆍ자식이 경영의 전권을 휘두른다는 것은 기업의 재앙이요, 실패의 제1조건이다. 드러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4대를 넘어간 가족기업이 없었으며,가족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경영자의 역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최근 몇몇 대재벌 총수와 그 가족이 경영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데,이는 극히 경계해야 할 일로써 시장의 냉철한 평가와 판단이 요구된다.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되 대주주와 사외이사들이 공동으로 감시하는 방식의 지배구조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 재벌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요구는 재벌총수들은 재벌전체의 경영을 총괄하고 모든 책임을 지든지,소수회사의 경영에만 전념하든지,아니면 대주주로서의 역할만 하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정부 정책,사회와 시장의 압력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 재벌의 모습은 조만간 크게 바뀔 것이다. 재벌 총수들의 경영권 독점이 해제되고 나면 각 재벌은 명칭 상호 이미지를 공유하는 독립기업연합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창업주의 가족들이 그룹의 명칭과 상호 등에 관한 권리를 소유하고,그 권리를 계열사들에 대여하는 기업을 설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각 계열사들은 전문경영자와 독립적인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하되 공통된 이미지를 공유하고 창업 총수의 일가는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 명칭 등에 대한 사용료를 받아 창업이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윈-윈 방식의 재벌 경영방식이 받아들여진다면 재벌개혁이 한결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업과 기업주를 구분하는 정책상의 지혜다. 우리 경제의 유일한 생산주체인 기업이 망하면 재벌개혁이고 분배정의고 없다. 우리 모두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ilsupkim@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