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성공 끝, 위기 시작..洪準亨 <서울대 공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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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準亨 < 서울대 공법학.베를린자유大 초빙교수>
숨 가쁜 한해였다.
붉은 악마들이 이뤄낸 월드컵 감격의 '현상'과 네티즌들이 이뤄낸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사건'이 2002년의 역사적 의미를 인증해 줄 것이다.
새로이 출범하는 노무현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약한 기성정치의 기반 위에서 출발한다.
한나라당은 2004년 17대 총선까지 비우호적인 의회 다수파로 남아있을 공산이 크다.
또 집권당이란 말이 무색하리만큼 민주당 내에서조차 헤게모니를 잡지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가산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이미 강력한 저지력을 확보한 반대당과의 관계에서,그리고 다른 의회외적 수단들의 동원이 종전보다 훨씬 어렵게 된 상황에서,과연 얼마나 효험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비록 과반수는 아니었을지라도 노 후보를 당선시킨 다수의 지지가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이 역시 정치적으로 행동가능한 단위가 되기는 어렵다.
또 이들에 대한 일상적 배려나 정치적 동원에 대한 기대는 자칫 '포퓰리즘'의 함정으로 귀결될 우려가 크다.
더욱이 국민은 작은 일에도 쉽게 실망한다.
여소야대로 골병이 들었던 김대중 정권보다 더 취약한 상황이다.
김 대통령은 그나마 국난 수준의 경제위기 와중이었기에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었다.
반면 오늘의 상황은 북핵문제 한·미관계 등을 둘러싼 정책조정과정에서 자칫 지렛대를 놓칠 수도 있는 오히려 더 위태로운 국면이다.
지난 대선 과정과 결과로 속이 상한 기성정치권은 언제라도 정권의 약점이 드러나기만 하면 코브라처럼 덤벼들 것이고,내각제 개헌 등 정치의 이권시장을 뒤흔들 요인들이 곳곳에 잠복하고 있다.
한편 개혁세력의 총집결을 가능케 할 정계개편이나,정치의 '인적 청산'의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리 높지 않다.
결국 노무현 정권은 성공의 길로 접어들자마자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그 참모,인수위,민주당의 관계자들이 이 냉엄한 현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노무현 정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자신을 뽑아준 지지자들의 절대다수가 열망한 정치 혁신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한반도 안보와 평화정착,선진경제시스템 구축 등 많은 과제들이 있다.
또 정치의 혁신 과제도 있다.
정치 혁신은 선거나 정당 관련 제도들의 개혁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성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써먹었던 낡은 룰을 근본적으로 바꿔 새로운 정치의 룰을 만드는 일이다.
세종로 거리를 붉은 물결로 덮었던 붉은 악마들이 요구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결과에 승복하는 대승적 정치,'정정당당 대한민국'의 정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보스정치,패거리 밀실정치,정치부패와 정경유착,이 모든 행태들과 결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추진해 나갈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 힘은 개혁프로그램의 설득력과 이를 추진할 새로운 중심세력으로부터 나온다.
새로운 중심세력을 형성하는 일은 정계개편이나 이합집산을 통한 보·혁 구도의 재편성이 이런 저런 이유로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정치혁신 프로그램에 대한 허심탄회한 정치적 네트워킹을 통해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정치 혁신 프로그램 하나하나에 대해 반대당 국회의원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지지를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형태를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물론 말과 논증,변론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적 풍토에서 토론을 통한 설득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 이상의 대안은 없다.
인수위 국민참여센터를 통한 '참여의 실험'에는 적지 않은 난관과 한계가 뒤따를 것이지만,어떤 방법과 기구를 통해서든 서두르지 말고 정부와 국민,대표와 대표되어지는 자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우는데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늦어도 2004년 총선 전까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해 현실정치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권 후반기의 순항도 보장할 수 없다.
2003년 2월,노무현 새 정부의 출범은 희망의 전조를 자아내지만,그 정치적 지형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가능성의 정치를 극대화시켜 나가는 실천적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joon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