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재벌개혁' 정책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집권 초기부터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던 기업개혁 정책들을 '점진적.자율적.장기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노 당선자가 밝힘에 따라 '재벌개혁'을 둘러싼 재계와의 갈등은 일단 수면 아래로 잠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재벌개혁 정책을 '시장친화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노 당선자의 방침은 재계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과 '연평균 7% 성장달성'을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현실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 '경제를 망쳐서는 안된다' 노 당선자는 이날 열린 인수위 일일 보고회의에서 기업개혁 정책과 관련, "배에 문제가 있더라도 항해하는 도중에 도크로 끌어올려서는 안된다. 배를 순항시키면서 싣고 있는 부품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재벌개혁'이라는 명분론에 치우쳐 경제를 망치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북한의 핵개발 파문과 세계 경제 장기불황 가능성, 유가급등 등 대외여건이 어느때보다 불안한 상황에서 '개혁'을 과도하게 밀어붙일 경우 경제가 좌초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선거공약으로 밝힌 경제관련 공약들을 실현하는 실질적인 주체가 기업이라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부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기업 투자활성화 유도'에 무게를 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 개혁조치 입법화에 주력 기업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관련법령을 고쳐야 한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고려됐을 것이라는 풀이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에서 기업개혁 관련법안을 제출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1년 12월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아직 국회 법사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국회에 계류중이다. 노 당선자측은 상속.증여세 완전포괄과세, 대기업그룹 금융회사 보유계열주식 의결권행사 제한, 사외이사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국회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실효성이 없다. ◆ '재벌개혁' 기조는 유지 노 당선자의 기업개혁 정책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추진될 뿐 근본적인 기조에서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속.증여세 완전포괄과세와 집단소송제 등에 대해 노 당선자측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는 이날 출자총액 제한제도와 계열회사간 상호출자.지급보증 금지 등 현 정부의 기업개혁 정책 골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미진한 부분을 더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시장친화적인 방식으로 기업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인수위측의 거듭된 다짐에도 재계가 여전히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