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기업들의 이야기 "우리는 해냈다"를 오늘부터 월,수,금요일자에 상.중.하로 나눠 싣습니다. 매주 한 회사가 소개되는 이번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를 바랍니다. --------------------------------------------------------------------- 지난해 약 2백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유리 가공업계에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자산유리'는 작은 유리가게가 모태였다.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 출신인 선친과 형님은 1959년 고향 이름을 따 서울 불광동에 '자산유리'가게를 열었다. 건물 처마밑에 포장을 치고 시작한 유리가게에 내가 몸을 담게 된 것은 6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배달용 자전거 한대 없이 장사를 했지만,65년쯤엔 종업원 2명을 데리고 운영할 만큼 가게 규모가 커졌다. 내가 군에 갔다 71년 제대할 때쯤엔 소규모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건 전과 마찬가지였다. 사업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건 75년 거울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판매만으로는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직접 생산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거울공장 매물이 나와 이때다 싶은 생각으로 사들였다. 당시 거울은 주문생산 방식이었는데,나는 그때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표준화된 거울 생산방식을 고안해냈다. 덕분에 수요의 기복에 관계없이 공장을 쉬지 않고 돌릴 수 있었다. '보오미'란 자체상표로 거울을 생산,공급한지 2년쯤 지났을 때는 서울 을지로 상가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미적 감각과 다양한 기능성으로 인기를 모았기 때문이다. 77년부터는 선친과 형님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혼자서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주택공사가 공급하는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수요가 급증,90년대 초반까지 아파트 건설시장의 70∼80%를 장악했다. 80년에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 공장을 '㈜자산기업(98년 ㈜보오미거울로 변경)'이란 법인으로 등록했다. 20여년만에 제대로 된 사업체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또 생산량이 늘면서 81년에는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으로 공장을 확장,이전했다. 대지 1천2백평에 건평 3백평이던 이 공장은 자동제경라인 도입 등 8번의 증설 과정을 거치면서 대지 4천평에 건평 2천5백평으로 외형이 커지고 내실도 튼튼해졌다. 97년엔 거울하나로 1백7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때 나는 사업을 키워온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쳤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우쭐했던 객기라고도 생각되지만,90년대 중반엔 파주시기업인협의회 회장으로 중남미 시장개척활동을 하는 등 대외활동도 왕성하게 했다. 넘치는 사업 의욕으로 97년에는 일반유리보다 강도가 5배 이상인 '강화유리'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거울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고 경쟁이 치열해져 발전가능성이 큰 새 사업을 펼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산유리는 예기치 못한 먹구름과 태풍을 맞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