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으로 향하는 지하철은 125가(街)역을 지나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힐끗거리는 힙합 스타일의 불량기 넘치는 청년들의 눈초리에 '할렘행 지하철을 조심하라'는 주변의 권고가 머리에 떠올랐다. 종착역인 센트럴 할렘에 도착해 취재학교를 찾아가는 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심조심 도착한 프레드릭더글러스 중.고등학교는 가시나무 같은 철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서 무슨 경제교육이 이뤄질까." 취재처를 잘못 짚었다는 생각에 낭패감이 밀려왔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니프티(NFTE) 창업교육 프로그램이 진행중인 중학교 2학년 교실을 찾았다. 니프티는 창업교육을 실시하는 미국의 청소년 경제교육 단체. 프레드릭더글러스 중.고등학교는 8년전 니프티 프로그램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했다. 학생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문서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이들이 만들고 있는 문서를 들여다봤다. 'business plan(사업계획서)'이었다. 한 학생은 '원스톱 아이스크림 가게'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짜고 있었다. "다양한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을 한 곳에서 팔거예요. 매장엔 컴퓨터 게임기를 설치,손님들을 끌어 모으죠. 아이스크림을 5번 이상 사간 손님에겐 컴퓨터 게임을 10분간 즐길 수 있는 쿠폰을 주죠." 이름을 묻자 학생은 올초 수업시간에 만들었다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창업교육 담당인 지나 라힘 교사는 "학생들은 중학생이 되면 수업시간에 자신의 비즈니스 계획을 짠다"며 "졸업 후 실제로 사업을 시작해 성공을 거둔 학생도 적지 않다"고 소개했다. 라힘 교사는 취재진을 학교 1층에 있는 '미니몰'(mini mall)로 안내했다. 미니몰은 방과후 학생들이 서로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 '학생들만의 장터'인 셈이다. 30평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엔 15개의 부스가 진열돼 있었다. "매학기 학생들의 사업계획서를 평가한 후 15명을 선발, 학생들에게 저 부스를 빌려줍니다. 물건을 판매하고 보관하는 일종의 미니점포인 셈이죠." 학생들이 부스에서 판매할 상품은 무슨 돈으로 마련하느냐고 물어봤다. "세계적 의류업체인 갭(GAP)의 사장께서 도와줍니다. 학기마다 부스당 2백달러씩을 지원해 주죠. 하지만 학생들이 지원금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세계적인 기업의 CEO(최고경영자)와 매년 두번씩 갖는 '대화의 시간'입니다." 교장실에서 학생대표 3명을 만났다. 전교 회장인 알바로군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아직도 경제적 약자(마이노리티)"라며 "누군가의 밑에서 합당한 대우도 받지 못하며 일하느니 차라리 내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회장인 아론군은 "어릴 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며 "작은 스튜디오를 만든 후 생일축하곡, 결혼축하곡 등을 직접 불러 판매하는 '맞춤 음반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한창일 때 한 학생이 슬러시(빙과음료)를 쟁반에 들고 교장실 문을 열었다. "슬러시 드실래요? 한 잔에 1달러예요." 미니몰에서의 장사가 여의치 않자 교장실까지 '원정 판매'를 나온 것이다. 그레고리 교장선생님이 주머니에서 5달러를 꺼내자 슬러시 5잔을 내려놓고 사라진다. "우리 학교는 하나의 '작은 시장'입니다. 미니몰과 니프티의 창업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과 자신감이지요."(그레고리 교장)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은 곳이라는 할렘. 이곳에서도 '자본주의의 꽃'은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뉴욕=최철규 기자 gr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