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공정공시(FD:Fair Disclosure) 제도가 좋은 예다.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번째다. 그렇지만 기업들은 "선진화 명분에만 집착해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도를 서둘러 받아들인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지적한다. '선진'이라는 것이 개념상 그렇듯 공정공시제의 도입 의도는 나쁠 것이 없다. "기업의 중요정보가 특정인에게만 제공되는 불건전한 공시관행을 개선함으로써 시장참여자간 정보의 비대칭(asymmetry) 현상을 해소하고 증권시장의 투명성 제고 및 투자자 보호에 기여할 것"이란 금융감독원의 설명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문제는 이런 기대와는 달리 이 제도가 기업이나 투자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가지 부작용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의 일선 담당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애로는 공정공시 대상인 '중요 정보'가 불명확하고 범위가 넓어 공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기타' '등'의 표현이 중요공시 대상 관련 규정에 포함돼 있다. 공시를 하자니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안했다가는 제재를 당할 수도 있다. 기업 경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예를 들면 앞으로 공시 대상 정보로 포함될 △재무상태 △영업결과에 대한 경영진의 토론과 분석 △임원의 보상내역 등은 경영기밀에 속하는 내용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정보의 남발에 따른 혼란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관련 규정이 지나치게 모호해 공시위반을 우려한 기업들은 주가 및 기업가치와 별로 관계없는 △장래 사업계획 △제품 안내 △마케팅 홍보 차원의 공시를 남발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사정에 밝지 못한 투자자들은 실제 중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오히려 알기 힘들어졌다. 정보는 공짜나 마찬가지로 얻기 쉬워졌지만 옥석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공시규정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가 과도해 투자자의 손해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포인트다. 1년에 두 차례 이상 공정공시 의무를 위반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하고 이후 6개월내 또 위반하면 상장폐지하는 제재조치는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공시 위반 소문만으로도 주가가 급락할 수 있다"는 경제단체들의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부작용은 사실 공정공시제 도입 전부터 기업들이 지적해온 사안들이다. 문제점과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이상 제도의 보완은 가능한한 빠른 것이 좋다. 특히 새 정부 초기부터 이런 문제의식을 관련 당국이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공정공시규정 등이 제시하고 있는 '회사 전체의 영업활동 및 기업실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 등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항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중요정보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현행 '수시공시기준'을 참조하는 것도 방법이다. 공시 여부에 대한 기준이 지금처럼 불분명하다면 공시 위반 여부에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제재조치를 내리는 일 또한 타당성을 갖기 힘든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위반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고 성실하게 공시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제재 조치의 경우는 경고조치 및 위반횟수 공개, 일정기간 유상증자 유예 등 투자자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는 쪽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고의성이 없는 위반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항을 신설할 필요도 있다. 정보 민주화를 통한 투자자 보호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그러나 성급한 제도 도입에 따른 기업 활동 위축과 이에 따른 정보 흐름 왜곡 현상 등 부작용이 계속된다면 그 가치는 실현되기 어렵다. 기업 투명성을 높이고 주식시장도 활성화하며 투자자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