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이용덕 자산유리 사장 (中) 고난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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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오뚝이'라고 부른다.
자산유리가 두 번의 큰 고비를 넘기면서 생긴 별명이다.
첫 고비는 지난 91년 1월 공장에 큰 불이 났을 때였다.
새해 첫 토요일,시무식을 마치고 친구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직원이 긴장된 목소리로 "불이 났다"고 전했다.
새벽같이 올라와보니 수십억원을 투자해 완성한 자동화라인이 새까맣게 탄 채 폐허가 돼 있었다.
"이제 쪽박 찼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직원들에게는 낙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게 어떻게 만들어온 사업인데…"라며 오기가 발동했다.
망연자실해 있는 직원들에게 나는 "이번 화재로 얻는 게 더 많을 수 있다"며 배짱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문제점을 꼼꼼히 파악해보라고 지시하고,관계회사들을 백방으로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다.
이후 지붕을 임시로 덮고 생산설비 응급복구를 시작했다.
문제점이 발견될 때마다 집단 토론을 했고,부품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으로,영등포로 뛰었다.
전 직원이 한마음으로 매달렸더니 13일만에 복구가 완료됐다.
기적같은 사건이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작은 힘이 모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걸 절감했다.
'불나면 부자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불이 났을 때는 불행중 다행으로 비수기였고 재고가 많아 수급에 큰 차질은 없었다.
오히려 자금사정이 호전됐다.
갚아야 할 돈은 미뤄지고 받아야 할 돈은 더 빨리 들어와 현금 7억∼8억원이 금방 확보됐다.
갈등하던 노사관계도 협력관계로 급반전됐다.
96년엔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당시 아파트용 붙박이장 설치 얘기 등이 나오면서 강화유리 사업을 하면 전망이 밝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50억원을 투자해 97년 봄 건설하기 시작한 강화유리 공장은 12월쯤 완공됐다.
그러나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로 98년 1월30일 부도를 맞고 말았다.
두번째이자 최대 고비가 온 것이다.
부도 징후는 3개월 전부터 감지됐다.
받을 어음 22억원은 모두 휴지조각이 됐고,현찰이 아니면 원재료도 사올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매출은 줄어만 갔다.
모두가 어려워 기댈 데가 없었다.
그렇게 무력하기는 처음이었다.
죽는다는 것 빼고는 모든 생각을 다 해봤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시간이 계속됐다.
가족들은 말없이 닭똥같은 눈물만 떨궜다.
30년을 바쳐 일궈온 사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원통하기도 했다.
나는 이때 술이 많이 늘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감도 생겼다.
요즘도 가끔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공장을 둘러본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막상 부도를 내고 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음이 후련하고 차분해졌다.
직원들에게는 "맞아 죽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질테니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고 옷보따리를 싸들고 와 사무실을 지켰다.
도피했을 줄 알았던 내가 당당하게 전화를 받자 채권자들이 예상밖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들이닥쳤다.
"회사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말에 그들은 소란 피우지 않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나는 1년여간 직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회사 살리기에 나섰다.
회계사 친구가 "화의를 신청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7월23일 서부지원에서 화의인가를 받자 자산 동결조치가 취해졌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자신감이 싹텄다.
이자만 내고 장사를 하다보니 현금이 쌓였기 때문이다.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