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은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기만 하면,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예언했다.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미륵의 용화세계를 기다린지 1천년은 됐다. 우리들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운명의 신은 왼쪽을 들까,오른쪽을 들까. 미래는 가만히 있어도 온다. 그래도 궁금하다. 이걸까 저걸까. 기대와 위안….그것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변혁을 이루었다. 월드컵대회에서 세계 4강에 올랐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아마도 국민의식의 성숙이라는 측면도 있지만,변화에 대한 욕구,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한편의 드라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힘의 물길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의 태도들 중에서 과거도 미래도 그리 집착하지 않는 성향이 세계시민 되는데 유리한 조건이 아닐까. 차이나타운이나 일본타운 같은 집단은 형성하지 못하는 한국인이지만,현지의 일원으로 적응하는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몰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지만,아직은 미국적 사고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지구촌이라는 세계국가로서의 세계경영이나 관리라는 입장에서다. 일반적으로 길은 도시에서 도시의 최단거리로 연결된다. 미국의 도로는 남과 북,동과 서의 십자로 연결돼 있다. 이 기본선에 도시가 연결된다. 새 땅이니까 가능한 그림이기도 하다. 십자로의 도로는 필요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땅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를 국경이 아닌 날줄과 씨줄로 나누듯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망을 구축하고 우주의 지도 길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세계를 관리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중국의 세계관리 경험이나 질서의식일까,아니면 인도의 다양성에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중국의 제국경영에 대한 경험이나 관료조직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케이스 중의 하나다. 인도의 다양성에 대한 기대는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다양성이 허용되는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바람직하지만 기본적인 틀의 문제는 남는다. 세계는 어디로 흘러갈까.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운명이라면,그것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운명이라는 말이 없다. 지은대로 받는다. 업(業)이라는 말도 과거에다 중점을 둔다면 운명적이지만,미래에다 중심을 둔다면 제한조건일 뿐이다. 인간은 행동의 근거를 과거 미래 현재 어디에도 둘 수 있다. 같은 미래를 그리지만 과거에 근거를 둘 때에서는 운명론자가 된다. 그러나 미래에 근거를 둘 때에는 이상론자가 되는 것이다. 판단은 감성적일 수도 있고 이성적일 수도 있다. 때로는 한과 같은 무의식에 지배받기도 하지만 외부적인 조건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신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마음이 관념의 틀 정도라면 이해는 간다. 구성원의 생각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세계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21세기는 정보화사회라고 말한다. 컴퓨터시대의 영웅은 최단거리를 찾아내는 자이다. 점과 점을 연결할 수 있는 선은 무수히 많지만 직선은 하나 밖에 없다.거기에는 시(是)도 없고 비(非)도 없고,선도 없고 악도 없다. 오직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이버 공간상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삭막한 세상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은 마련된 것이다. 그 꿈이 어떤 꿈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좋은 꿈을 꿀 수도 있고 나쁜 꿈을 꿀 수도 있다. 운명은,미래는 우리들이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하는 것만큼 좋은 세상이 된다. 노력하는 것만큼 우리들의 세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조금은 멀리 보고 넓게 생각하는 여유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장자에 보면 춘(椿)이라는 나무이야기가 나온다. 춘은 8천년을 봄으로 살고 8천년은 가을로 사는 나무다. 그러나 크기만 했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목수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쓸모없기 때문에 천수를 누리고 크게 자라서 큰 그늘을 만든다. 길가는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만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