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이중가격'이 침체 부추겨..'불황 미술시장' 긴급점검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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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의 불황이 심각한 수준이다.
미술품 판매부진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지난해는 미술품이 본격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70년대이후 "최악의 한 해"였다.
지난해 서울에서만 20여개 화랑이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상태에서 "개점휴업"인 화랑도 적지 않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14일 편집국 회의실에서 작가 화랑대표 컬렉터 평론가 미술경매업체 대표 등을 초대,미술시장 불황의 내부적 요인들을 짚어 보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 참석자 ]
김순응 서울옥션 대표
김종근 홍익대 교수
박명자 갤러리현대 대표
안종만 박영사 회장
이종상 서울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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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지난해 개인전을 가졌던 작가들을 만나 보면 1점 팔렸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하더군요.
월드컵에 대선까지 겹쳐 미술계가 '혹한'에 비유될 정도의 힘든 한 해였습니다.
국내 화랑을 대표하는 갤러리현대는 어땠습니까.
▲박 사장=정말 힘들었습니다.
지난해 비수기 때 적자를 각오하고 박수근전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6만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그 수익금으로 몇 개월을 버티는 식으로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관장=화랑도 이 지경인데 작품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작가들은 그 어려움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호황을 누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불황기에도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습니다.
▲김 교수=미술시장이 이렇다 보니 2∼3년만에 한번씩 전시를 열었던 30∼40대 젊은 작가들의 상당수가 개인전을 미루고 있습니다.
인사동에 있는 화랑의 90%가 기획전을 포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쨌든 미술품이 안 팔리는 것은 미술계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사회자=경매가 2차시장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신작을 선보이는 화랑은 1차시장입니다.
문제는 비중이 크고 훨씬 중요한 1차시장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랑에서의 작품가격은 화랑과 해당 작가가 협의해 결정하는데 이게 너무 주관적이다 보니 미술애호가들이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 교수=제가 아는 한 컬렉터는 20년동안 작품을 구입해 왔는데 최근 몇년간 단 한점도 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중가격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나카마(중개인)'를 통해 뒷구멍으로 사면 싸게 사는데 화랑에서 비싸게 주고 구입하는 사람들은 '바보'라는 얘기죠.현실이 이러니 미술애호가들이 화랑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거지요.
▲이 관장=미술품의 '이중가격' 형성이 미술의 불황을 부채질했다고 봅니다.
저의 스승이었던 대가들은 옛날에 컬렉터와 직거래를 했습니다.
화랑이나 미술품의 유통구조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관행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요즘에도 많은 작가들이 화랑을 제쳐두고 직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후배작가들에게 "절대 직거래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별로 먹혀들지 않더군요.
미술품에 이중가격이 형성되는 직접적인 책임은 작가에게 있다고 봅니다.
▲박 사장=갤러리현대는 작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경우가 90%에 달합니다.
화랑이 생각하는 가격과 작가가 요구하는 가격간의 갭이 너무 큽니다.
작가들도 경기가 안 좋은 상황이면 시장원리에 따라 작품 가격을 내려야 하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시장과 동떨어진 작품가격을 고집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개인전을 마련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김 대표=경매회사 입장에서 볼 때 가격을 조금 낮추면 팔릴 만한 작품이 많은데 작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몇년만에 갖는 개인전에서 작품이 안 팔리는 경우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사회자=작가로부터 작품을 직접 구입하는 컬렉터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안 회장=저는 화랑에 가서 작품이 마음에 들면 그냥 삽니다.
가격이 좀 비싸다 싶으면 화랑측에 깎아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있죠.하지만 작가에게 구입한 적은 없습니다.
▲김 교수=컬렉터는 두 부류가 있다고 봅니다.
A급 컬렉터는 화랑에서 정말 좋은 신작을 제값 주고 삽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대표작을 소장해야 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지요.
질보다 양을 따지는 컬렉터는 가격을 무조건 깎거나 아니면 개인전에서 안 팔린 작품을 저가에 구입하기 위해 작가와 거래하려고 듭니다.
▲사회자=화랑과 작가간의 신뢰회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군요.
일부 화랑들은 판매 부진을 경매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화랑을 출입하던 컬렉터들이 등을 돌려 경매 쪽으로 몰리다 보니 그런 불만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사장=웬만한 작가들은 경매에서 자신의 작품이 얼마에 거래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매에서 낙찰되는 미술품 가격은 화랑에서 판매하는 신작의 3분의 1,심지어 5분의 1인 경우도 있습니다.
역량 있는 어떤 중견작가가 지난해 강남의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백호 크기의 작품 판매가격이 5천만원이었는데 전시기간 중 경매에서는 그 작가의 기존 작품이 1천8백만원에 출품됐습니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그 중견작가는 한 점도 못 팔았습니다.
경매업체는 개인전을 갖고 있는 기간 중에는 그 작가의 작품을 경매에 출품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줬으면 합니다.
▲박 사장=미술관들의 작품 구입방식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국·공립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입할 때 심의를 거치는데 심의위원들의 80% 정도가 작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심의위원들은 화랑을 통한 구입을 반대합니다.
'작가로부터 직접 구입하면 싼데 뭐하러 화랑을 통해 사느냐'는 거죠.화랑들이 다 문을 닫으면 작가들은 어디서 전시를 합니까.
미술시장 활성화에 기여해야 할 미술관이 오히려 미술시장의 유통구조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관장=작가들도 미술관 횡포에 불만이 많습니다.
미술관이 시중 거래가격의 40∼50% 정도 주고 사가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재료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을 주거나 아니면 '기증'이라는 명목으로 거저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미술관들이 작품을 거의 강탈해가려고 하니 좋은 작품을 줄 리 만무이고 그러다 보니 미술관의 컬렉션 수준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김 대표=미술시장의 규모가 커지기 위해선 유통구조가 개선돼야 합니다.
소비자들이 화랑에서도 미술품을 사고 경매에서도 살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 줘야 화랑도 발전하고 경매업체도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사장=늦은 감이 있지만 저의 화랑은 앞으로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많이 제공할 계획입니다.
젊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고객에 대해 '환불제(refund)'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컬렉터들이 안심하고 젊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대합니다.
▲사회자=미술시장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정부의 지원정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지만 노 당선자나 인수위에서는 지금까지 문화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지 않습니까.
▲이 관장=미술시장의 장기불황은 정치적인 요인도 있다고 봅니다.
미술시장은 1990년대 초 꺾인 이후 지금까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10여년동안 미술정책은 그 이전에 비해 오히려 후퇴했습니다.
▲박 사장=지난 60∼70년대에는 정부에서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공공기관들에 대해 작품 구입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부터 지금까지 공공기관들이 작품을 아예 사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미술 같은 고급 문화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안 회장=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미술품이 좋아 오랫동안 작품을 구입해 왔는데 하루는 경리부장이 와서 "사장님! 앞으로 작품 사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회사 망합니다"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세무서 직원이 왔다 갔습니다"고 했답니다.
그 친구는 선진국은 기업이 미술품을 구입하면 손비를 인정해 주는데 우리나라는 세무조사를 한다면 누가 미술품을 사겠느냐고 불만을 털어 놓더군요.
내년부터 종합과세가 시행된다면 저부터라도 미술품을 팔지도 사지도 않을 겁니다.
▲김 대표=1998년 파리에서 아트페어가 열렸는데 전시기간 중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 화랑 대표들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해 격려하더군요.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디자인'을 모르는 관료들은 '리자인(resign·물러나라는 뜻)'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선진국 국가 원수들이 자국 문화를 육성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들을 보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