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신중해야 할 선심정책..安世英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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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별을 단 장군이 경제기획원 예산실을 찾았다.
국방예산 삭감에 거세게 항의하기 위해서다.
팽팽히 맞선 관료와 권력의 핵심 사이에서 같은 장군 출신의 대통령은 예산관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무소불위의 권력기관들도 예산을 따내는 데는 관료들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예산효율주의의 전통이 언젠가부터 흔들리고 있다.
전문적 지식이나 신중한 검토없이 선심성 정책부터 우선 발표된다.
당연히 정부 돈을 받을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같이 형성된 특정 수혜집단,시민단체 등은 여론을 등에 업고 재정지출에 난색을 표하는 정부관료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몰아붙인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대선 공약사업으로 강행된 의약분업이다.
초기 논의과정에서 국민의 편에 섰다는 일부 학자,시민단체가 이를 반대하는 전문가와 관료들을 얼마나 반개혁적으로 몰아붙였던가.
결과는 당초 예상과 상반된 멍든 재정부담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개인과 국가가 엄청난 추가 부담을 해야함은 물론 영세 동네약국은 문을 닫고 대형약국만 살찌우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산에 대한 도덕적해이가 다시 만연하고 있다.
그간 신문에 보도된 인수위의 정책은 개혁과 선심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개혁에는 반드시 기득세력의 반발이 있기에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따라서 학자적 순수성이 배어 약간 설익은 듯한 감이 있더라도 개혁의 강도는 높이면 높일수록 좋다.
그래야만 지평이 넓어진 개혁파와 기득세력 사이에서 새 대통령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선심정책은 다르다.
공약이행이건 분배의 명분을 내세우건,인수위의 이러한 정책발표는 신중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새 정부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발표된 선심정책은 예산을 동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혜집단의 기대수준을 높여 또 다른 재정부담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농가부채경감을 위해 이자율을 1.5%로 내린다는 발표를 하면 농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거저 이를 얻어냈으니 새 정부에 대한 요구의 출발점을 1.5%에서 시작해 더 많은 경감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여론몰이식 예산요구와 선심행정이 뒤섞이면 국가재정은 빠른 속도로 곪아갈 것이다.
새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적자재정을 물려 받았다.
따라서 재정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각종 불안요인을 없애면서 균형재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산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예산은 어디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정부는 이 국민의 돈을 대신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의무를 국민에 대해 지고 있는 예산관료는 잘못된 예산요구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를 무시하면 예산은 목소리 큰 특정집단과 정치적 배려에 의해 낭비될 소지가 크다.
둘째, 인수위는 공약이행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예산을 핑계 대는 관료들과 티격태격할 필요가 없다.
공약이란 말 그대로 후보 때 유권자에게 말한 것에 불과하다.
일단 대통령이 되면 유권자가 아닌 국민 전체를 상대로 국가정책을 펼쳐야 한다.
따라서 국가적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다든가,상황이 바뀌면 공약이란 조정될 수 있다.
명심해야 할 점은 공약에 대해 '타당성 조사'를 하는 것도 공약의 이행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유를 갖고 공약별로 타당성 조사를 해가며 향후 5년간 나라살림의 큰 그림 속에서 연차별 이행 계획을 세우면 된다.
세금은 기업이나 부자만 내는 것이 아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불쌍한 영세민도 낸다.
가난한 국민이 낸 세금이 상습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크게 내는,그러나 그들보다 더 잘 사는 특정계층에 가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들은 분노할 것이다.
또한 오늘의 선심으로 초래된 재정적자를 다음 세대의 세금으로 메우게 되면 그들 또한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syahn@ccs.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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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