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김형순 로커스 대표 (2) '벤처신화' 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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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가 한창인 지난 99년 1월.로커스는 영국계 금융회사인 자딘플레밍 일렉트라(JF Electra)로부터 1천6백만달러를 투자받았다.
전체지분의 34%를 인수한 자딘플레밍은 당시 액면가 5천원이던 주식을 26배인 주당 13만원에 계상했다.
김 대표가 자본금 1천만원으로 창업한 지 8년6개월만에 기업가치가 6백억원 규모로 늘어난 셈이다.
로커스는 콜센터와 VMS(음성사서함시스템) 등으로 국내 CTI(컴퓨터전화통합)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벤처 신화'가 탄생했다며 로커스와 김 대표를 연일 보도하는 등 관심이 대단했다.
외국 투자기관이 국내 벤처기업의 기술력을 인정해 투자를 결정한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벤처기업 꿈은 미국에서 싹텄다.
미국 MIT 경영대학원을 나온 그는 컬럼비아대 박사과정을 밟던 중 89년 뉴욕 맨해튼에 10평짜리 허름한 회사를 차렸다.
뉴욕 주립대 룸메이트였던 전지웅씨(현 로커스USA 대표)의 집 지하실에서 수차례 모여 사업이야기를 나누다 창업한 것.
그러나 아쉽게도 사무실 개소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새벽에 첫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회사를 한꺼번에 얻은 운 좋은 날이었습니다"고 그는 말했다.
회사를 세웠지만 아이템이 정해진 건 아니었다.
사업에 대한 뜻이 강했고 어차피 할 사업이라면 회사부터 세우고 그 속에서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는 무역업부터 시작했다.
또 쇼핑몰을 건립한다며 부지물색과 현장답사를 하는 등 하루에도 수십개의 아이템을 조사하고 자료를 모았다.
이것이 로커스USA의 모태였다.
이 회사는 연간 5천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김 대표는 한국에 돌아온 90년 7월 서울 홍익대 근처에 4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어 국내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미국은 지사로 운영한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시장 사정이 너무 달라 전 대표가 미국을 맡고 김 대표가 한국을 나눠 맡기로 했다.
박사과정을 밟지 않고 사업하는 걸 안 그의 아버지가 집에서 알은체도 하지 않아 마음 고생이 심했다.
첫 사업은 일일 팩스 뉴스 자동검색 서비스.
전세계에서 수집한 수천개의 하이테크 뉴스를 지능이 부여된 검색엔진을 통해 특정 기사로 편집해 팩스로 보내는 모델이었다.
첨단분야라 꽤 인기가 있었다.
미국을 오가던 그는 로커스USA와 같은 빌딩에 있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VMS를 파는 걸 보고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 CTI분야가 뜨고 있던 때여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CTI는 현재 로커스의 기반사업이 됐다.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