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신호를 분명하게 하라..柳東吉 <숭실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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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불이면 서야 하고 파란불이면 가야 한다.
왼쪽으로 가려면 왼쪽 깜빡이를,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쪽 깜빡이를 켜야 한다.
이건 국제적으로 지켜지는 약속이자 규칙이다.
교통흐름이 순조로우려면 신호체계가 잘 돼 있어야 한다.
방향표시도 않고 방향을 바꾸거나,규칙을 어기는 운전자가 많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동차의 방향표시등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꿔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약속위반을 머리카락 염색하듯 멋으로 아는 모양이다.
정부가 내거는 구호나 정책도 분명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김대중 정부의 '제2 건국'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많은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을 혼란시키는 '고장난 신호등'처럼 인식됐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내외 여건은 좋지 않다.
세계경제는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새 성장동력 창출은 부진하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의 반미 분위기,북핵(北核)문제,이라크 전쟁발발 가능성 등등은 한국사회와 경제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완벽하게 좋은 조건에서 출범하는 정부가 어디 있는가.
방향만 잘 잡고 신호가 분명하면 문제는 풀릴 수 있다.
위기라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 기회가 공존한다.
성장이냐 분배냐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고 오해도 있는 것 같지만,성장 없는 분배도 개혁 없는 안정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과 분배,개혁과 안정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역대 정부는 출범하면서 개혁을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개혁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각이 각기 다른 것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혁이란 모든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그런 개혁은 시한을 정해두고 끝내는 작업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혁은 몇가지 가시적인 조치나 법령의 개정 또는 제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잘못된 제도와 관행도 나름대로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걸 바로 잡으려면 법령 한두개 바꾸는 것으로는 안된다.
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개혁을 끝없는 장정(長征)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개혁이란 말에 왜 재계는 떠는가? 개혁이란 이름을 빌려 '기업 길들이기'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인가? 재계는 인수위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에 놀라는가 하면,새정부 정책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눈치보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전경련은 최근 총액출자규제 부채비율규제 등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를 냈다.
어느 집단이든 그 주장에 이기적 요소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기업인의 목소리를 '조직적 저항'이라거나 '기득권 지키기'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
기업환경의 획기적 개선요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경제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 가자는 게 아니다.
경제성장의 주역은 기업이다.
국내기업은 물론 외국기업들도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고 평가한다.
이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한국의 기업환경이 중국보다 못하고,첨단산업도 3년 뒤 중국에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최근의 보도는 한국경제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을 말해준다.
한국이 정보통신기술산업(IT)에서는 앞서가고 있다고 하지만 세계경기에 따른 변동폭이 커서 불안한 측면도 많다.
또 여기에만 매달릴 수도 없다.
차세대 유망산업에도 한발 앞서 나가야 한다.
예컨대 BT(생명기술) NT(나노기술) ET(환경기술) CT(문화콘텐츠산업) 등의 산업화에는 장기간이 소요된다.
그러기에 더욱 서둘러야 한다.
미래를 열어가려면 남보다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지만,정부가 시장의 규율을 대신하는 것은 기업의 손발을 묶을 수 있다.
기업의 왕성한 투자의욕을 부추기면서 기업경영의 행태나 투명성을 바로잡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빨간불을 켜놓고 가라 하고,파란불인데도 서라고 하면 기업은 헷갈린다.
기업을 마음껏 뛰게 하자.중요한 건 기업 길들이기가 아니라 정부의 올바른 신호다.
yood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