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5시. "아직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아마 오늘은 가격조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LG칼텍스정유 관계자) 기름값 기습인상이 발표된 이날 기자는 하루 종일 정유업체들과 신경전을 펼쳐야 했다.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에 따라 국내 기름값 추가상승이 예정된 상황에서 인상폭과 그 시기에 대해 관심이 집중된 탓이었다. 그러나 정유업체들은 이날 하루 내내 "아직 결정된 바 없으며 가격조정 관련 회의도 예정돼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오후 6시가 돼 가던 무렵.느닷없이 현대오일뱅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휘발유는 ℓ당 40원,경유 등유는 ℓ당 20원씩 인상한다는 사실을 통보해 온 이 회사 관계자의 첫마디는 "또 올려서 죄송합니다"였다. 이어 30분도 채 안되는 사이에 나머지 업체들도 속속 가격인상을 통보해왔다. 한 회사가 '총대'를 메자 너도 나도 앞다퉈 값올리기 행렬에 동참하는 모습이었다. 정유업체들의 이같은 '눈치보기 작전'은 그동안 수도 없이 되풀이돼 왔다. 지난달 중순에도 SK㈜가 등유값을 올리자 나머지 회사들은 하루 늦게 가격인상을 발표했다. 이 때도 업체들이 번갈아가며 '총대'를 메고 있다는 따가운 지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국제유가와 환율변동을 반영한다면서도 기름값을 올릴 때는 매달 혹은 보름단위로 큰 폭으로 올렸다가 내려야 할 상황에서는 2∼3개월씩 미적거리며 시기를 최대한 늦추다 '쥐꼬리'만큼 내리는 행태를 반복해 여론으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정유사들은 이제 가격고시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펴고 있다. SK㈜ 관계자는 "1997년 석유제품 가격자율화 이후 가격고시라는 말 자체는 의미가 없어졌다"며 앞으로 수시로 기름값을 조정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에쓰오일은 오래전부터 시장평균가격에 연동해 가격을 수시로 조정한다며 가격변동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있다. 기름값이 오르면 서민경제에는 큰 주름이 지게 마련이지만 앞으론 가격이 오르더라도 시장에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만 하다. 정태웅 산업부 대기업팀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