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9년 군에서 제대한 나는 대학에 복학할 수 없었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가난한 가족들을 보면서 장남인 내가 복학을 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대학생활은 군대가기전 대구대(영남대 전신) 운동장을 1년 밟아본 것이 전부다. 제대 이듬해 대구 서문시장에서 한평 남짓한 가게를 열어 옷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옷을 도매상에서 사다가 팔았다. 좀 지나면서 직접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만든 옷이 주름치마.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지역 패션을 선도했다. 이때 나는 서울로 진출할 결심을 했다. 지방 패션중심지라고 일컫는 대구에서의 성공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래서 1972년 서울 평화시장에 매장을 내고 봉제공장도 세웠다. 평화시장에서는 "미도사"로 통했다. 서울입성 1년도 안돼 미도사는 손님 많기로 유명한 가게가 됐다. 이같은 성공엔 나름대로 비결이 있었다. T셔츠를 속옷천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촉감이 부드러워 입어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공장에서 상품이 나올 시간이면 전국에서 온 도매상인들이 현금뭉치를 들고 줄서 기다렸다. 얼마의 돈을 번 나는 1980년 신라레포츠라는 법인을 세우고 스포츠의류시장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모험에 나선 셈이었다. 국내에 스포츠열풍이 불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업초기엔 직원이 늘고 매장수도 증가하는 등 꽤 괜찮았다. 그러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해외유명 스포츠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이름없는 브랜드(텐넥스)로는 힘에 부쳤다. 백화점에서도 매장위치가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올림픽이 열린 그해 물건이 팔리지 않아 50억원정도의 손실을 입었다. 재고는 쌓이고 은행빚은 늘어갔다. 우리 상품을 팔던 거래처들도 문을 닫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체념에 빠져 있던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93년께로 기억된다. 유명 브랜드인 "낫소"브랜드를 의류에 접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낫소로부터 받았다. 이후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국에 50여개의 점포를 냈다. 매년 30%대의 성장가도를 달렸다. 빚도 갚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또다시 나를 시련에 빠져들게 했다. 백화점들의 도산이 잇따르면서 30억원 상당의 부도를 냈다. 나는 전재산을 담보로 은행빚을 얻어 갚아 나가면서 재도약을 노렸다. 우연찮게 2001년 고급 양장지 원단을 이용해 만든 트레이닝복이 대히트를 쳤다. 유명백화점 스포츠의류브랜드 매장중 최고 매출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제자리를 잡았다. 요즘엔 중국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베이징 단둥 등에 4개의 매장을 냈다. 오는 2005년까지 중국에 30여개의 점포를 낼 목적으로 밤잠을 줄여가며 일에 매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