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在爀 < 시인.고려대 독문학과 교수 > 새해가 시작됐지만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엔 희망찬 빛보다는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듯한 기색이 엿보인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대로,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대로 모두들 회오의 감정과 안타까움을 가슴 한쪽에 품은 채 그렇게 밝아온 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뭔가 결핍된 모습들이다. 오스트리아의 여류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에겐가 들은 이야기지만 에게해에는 오직 꽃들과 사자처럼 생긴 바위들뿐인 섬이 하나 있다고 한다.우리들이 사는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잠깐 피었다 지는 꽃들이 그곳에서는 한해에 두번씩이나 풍성하고 화려하게 만발한다.척박한 땅과 험준한 바위가 오히려 꽃들에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결핍이 꽃들을 아름다움의 품에 안기도록 해주는 것이다" 결핍과 척박함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리는 밑거름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위투성이의 섬에 피는 그 꽃은 충만을 향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의지의 산물이다. 그 꽃속에는 그 섬의 파란 하늘에 떠가던 하얀 구름의 자유로움과,잠시 지친 발을 쉬어가던 철새의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과,삶이 시들해질 때마다 다가와 잎새를 흔들어주던 다정한 바람의 손길을 향한 모든 그리움이 한데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애틋한 그리움을 만들어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매섭게 몰아치던 바다폭풍과,천지를 삼켜버릴 듯이 쏟아지던 폭우와,바다 위를 무서운 눈초리로 떠가던 먹구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아닐까. 추위속에서 벌벌 떨며 그리던 따스한 밥 한숟갈 같은 것,그것이 개화를 향한 그리움이 아닐까. 근 20여년 전 어느 추운 겨울밤,단칸방에서 혼자 먹던 라면 생각이 난다. 그때 그 외풍 심하던 방,그 차가운 공기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의 모양새,젓가락의 손길을 기다리던 김치의 그 붉은 희생정신,그 쪽으로 정신없이 쏠리던 나의 그 뜨겁던 마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그만 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던, 녹색 표지의 릴케의 '기도시집'이 생각난다. 그 중 '가난과 죽음의 서(書)'에서 릴케는 프란체스코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그는 어디로 갔는가,소유와 시간에서 벗어나/위대한 가난으로 그토록 강해져서는/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벗어던지고/주교의 법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유유히 나타난 그 자는" 모든 것을,그러니까 명성과 부를 비롯한 세속적인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는 프란체스코의 그 활달함과 기개는 지금도 눈에 훤하다. 그의 가난은 옷을 벗는 것으로 상징되는 적극적인 가난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절제를 향한 결단이다. '가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았던 프란체스코는 오히려 가진 것이 없음으로 해서 인간적인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바하만은 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지금은 대추야자 씨가 싹트는 아름다운 시절!/추락하는 것들마다 날개가 달렸네요. /가난한 이들의 수의에 장식단을 달아준 것은 빨간 골무" 바하만은 끝없이 추락하는 것들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날개를 보고 있다. 그것들의 떨어짐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다. 대추야자 씨는 바람에 훨훨 날려 어디엔가 떨어져 언젠가는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던 아름다운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 피워 올릴 것이다. 니체 식의 니힐리즘이 절망으로 가득 찬 허무가 아니라,5백∼6백년마다 한번씩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불을 피워 타 죽고,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불사조와 같은 재생을 의미하듯이. 바다에서 뭍으로 나오면 이내 죽어버리는 물고기가 있다고 한다. 이 물고기를 살려 운반하는 방법이 있는데,그것은 이 물고기의 천적을 함께 담아서 옮기는 것이라고 한다. 눈앞에 자기 목숨을 앗아갈 적이 있는 상태에서는 정말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생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약간의 결핍과 긴장이 아닐까. 지금 당장의 고난과 결핍이 미래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낼 훌륭한 조각가의 거푸집 같은 것이 되기를 우리 모두에게 기대해본다. jjhkim@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