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출범일이 다가오면서 우려반 기대반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은 노무현 정권이 갖는 시대적 실험성이다. 민주적 공고화 과정에서 직면해야 하는 정치적 실험도 그렇고,급속한 근대화 작업이 배태시켰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도 실험정신으로 접근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험무대가 비켜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외교영역이다. 한국외교에 있어 대미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지난 반세기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외교를 미국중심외교라고 규정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 한·미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남북관계의 변화 및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자연스러운 기능조정의 필요성 때문이었고,높아진 한국인의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국가간 관계도 자신감이나 정서적 요인과 같은 요소가 작동하는 공간이 있다. 국력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국가의 명성(reputation),혹은 국가 이미지다. 주권의 범위가 그렇듯 국가 이미지 또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결정된다.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이미지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노무현 정권의 출범이 새로운 도전이라고 간주하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때때로 대미 자주외교의 필요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예전 양국관계 패턴의 복원을 기대하며 '노무현 다루기'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최근 미국 일각에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민이 원한다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발언은 기존 한·미관계의 형식변화를 우려하는 미국내 보수파들의 의도를 담고 있다. 이것은 또한 지난 50년간 한국의 안보가 주한미군의 존재 위에서만 확보된다고 믿어 왔던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민이 원한다면'이라고 단서를 달고 있지만,그 결정의 주체는 미국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수차례에 걸쳐 전면적,혹은 부분적 철수를 시도한 바 있다. 그 외교정책의 결정에 한국의 요구가 배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대한 판단이 그 전부였다. 이러한 패턴은 앞으로의 한·미관계,특히 주한미군과 관련된 결정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는 등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외교적 과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조정해 나가느냐를 두고 전개될 것이다. 여기엔 핵문제 해법과 관련되어 북한변수가 개입돼 있다. 3각관계의 두 변을 전향적으로,그리고 균형적 시각을 견지하며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안정과 평화정착을 위해 적극적 방도로 대미외교를 전개해야 하며,동시에 활발한 대북 포용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국가들에 대해서도 균형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미국 일변도 외교에 의존할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외교는 국가들의 이익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공통 이익의 범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조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외교이며,국가이익의 크기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외교적 협상력이다. 국가의 외교적 협상력의 중요한 원천으로서 국민적 지지가 존재하고 있다. 새로 출범하는 행정부로서는 한국이 처해 있는 국제정치적 위상을 고려해 색깔이 뚜렷한 외교정책 노선을 천명해야 하며,이것에 대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넓혀야 한다. 그 노선은 국민의 미래지향적 희망을 담으면서도 한국의 지역적 역할을 보여주는 전략적 비전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또 그러한 정책을 통해 형성되어 갈 국가 이미지를 고려해야 한다. 남북 분단과 통일,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평화'라는 화두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험은 다소의 불안감과 함께 진행된다. 지금껏 해왔던 방법이 심리적 안정감을 줄지는 모르나,안정감은 타성이라는 복병과 함께 존재한다. 타성에 젖으면 방향감을 잃기 쉽다. 실험정신은 변화를 꿈꾸는 약속과 같은 것이다. kimkij@yonsei.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