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가는 길은 황량했다.


차라리 그래서 좋았다.


분단 50년만에 뚫린 땅길이 마냥 화사한 꽃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옹기종기 모인 구릉과 야산들을 따라 구불구불 뿌리를 내린 바위들.


땔감이 필요해서 그랬는지 함부로 베어진 나무들.


5백m 간격에 부동자세로 늘어선 북한 경계병들의 무심한 표정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코 탄성은 없었다.


누군가 얘기했다.


육로관광은 보고 듣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느껴야 할 뿐이라고.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 관광지까지는 19km 남짓.


승용차로 간다면 2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지만 관광버스는 한 시간을 달린다.


폭 4m에 7번 임시국도로 불리는 비포장 도로다.


육로관광의 모든 의미와 느낌은 이 한 시간에 축약돼 있다.


철조망 사이로 북한의 삶을 엿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놀라울 정도로 야트막한 건물들과 회색빛 덧칠을 한 주택들이 늘어서 있고 겨울철 밭갈이에 나선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로 가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과 가끔씩 그들을 제치고 지나가는 자전거들.


그 사이로 목도리로 머리를 두른채 연을 날리는 철부지 아이들의 풍경도 들어왔다.


맑은 공기도 빼놓을 수 없다.


햇살 부서지는 버스 창문을 살짝 열어보면 천하명산 금강산의 기운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30분쯤 달리자 백과사전에서 손바닥 크기도 안되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감호가 손에 잡힐듯한 거리에서 겨울 바람을 맞으며 관광객들을 맞았다.


이야기책 속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배경이 바로 감호다.


경포호보다 조금 작은 이 호수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집을 짓고 살며 그 절경에 감탄했던 곳이다.


감호에서 시선을 거두니 금강산 끝자락인 적벽산이 눈에 꽉 찼다.


그 오른쪽으로는 낙타등처럼 구부러진 구선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선 이 봉우리는 꼭대기에서 아홉 신선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전설 때문에 구선봉이란 이름이 붙었다.


구읍리 마을과 온정천이 보일 때 버스는 이미 삼일포를 지나고 있었다.


옛날 외국 장수가 이곳의 천하절경에 빠져 사흘동안 호숫가에서 머무르다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일포 백사장을 끝으로 버스는 북측 CIQ(금강산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해 관광객들을 내려 놓았다.


잠깐의 통관 절차를 끝내고 먼저 간 곳은 온천장.


따뜻한 물에 여행의 피로와 긴장감을 씻어 내렸다.


범상치 않은 여정에 때아닌 이야기 꽃이 피어났다.


간헐적으로 눈발 날리는 노천 냉탕에 몸을 담글 생각을 했던 것도 금강산이 가져다 준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구룡연에 올랐다.


육로관광에 맞춰 자율관광이 실시되면서 구룡연이든, 만물상이든 원하는 곳을 고를 수 있었다.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1m가 넘는 눈들이 쌓여 온 천지가 환했다.


미끄러지고 넘어졌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코스.


약수도 마시고 누군가 가져온 위스키도 두어 모금 찔끔거렸다.


네시간이 넘는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곳은 북한식당 '목란관'.


우리나라 음식점보다 양은 적었지만 식은 밥으로 내온 비빔밥과 된장을 푼 냉면은 맛있었다.


해질녘 호텔 해금강은 하루 일정을 마친 관광객들로 북적댔다.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바에서 일행들은 생맥주를 한잔씩 했다.


저마다 관광을 제대로 즐기려면 이런 저런 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금강산은 그대로도 좋았다.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그저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길 수 있는 썩 괜찮은 여행이었다.



금강산=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