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서울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두 군데서 동시에 열렸다. 우익측에서 주최한 서울운동장대회는 '기미선언 전국대회'라 했고,좌익측에서 주최한 남산공원대회는 '3·1절기념 시민대회'라 했다. 행사를 마친 군중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시가행진을 하던 중 남대문에서 충돌,돌팔매질과 함께 유혈난투극이 벌어져 경찰이 발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3·1절 행사는 지방에서도 일제히 열렸는데 부산 정읍 순천 제주도 등지에서는 일부 흥분한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는 38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고 당시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같은 해 광복절행사 역시 좌·우익이 별도로 치러 양 진영의 대립을 또 한번 극명하게 표출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반탁운동,좌우합작,남한의 단독정부수립 주장 등이 얽혀 이념투쟁이 촉발됐고 이로 인해 한동안 극심한 혼란에 휘말렸다. 3·1절 소요사건은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피할 수 없는 사태였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올 3·1절에 보수와 혁신진영 양측이 서울 시청앞 광장과 여의도에서 각각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돌발적인 충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급기야 각계의 원로들이 한데 모여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남북해빙이 진행되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보수와 혁신의 대립은 북핵문제가 터지면서 극단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우리 역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 5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2001년 광복절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 대축전행사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이 돌아왔을 때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소동은 광복후의 좌·우익충돌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어느 사회든 보수와 혁신은 있게 마련이어서 무조건 백안시할 일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이념적 다양성은 곧 사회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핵문제로 야기된 이념대립 양상은 국가안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어서 걱정스럽기만 하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