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매화'] 강바람 봄바람이 피워낸 눈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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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어김없다.
누그러들던 추위가 다시 날을 세우고 여린 봄볕을 비집고 들어왔다.
강원 산간지방의 큰 눈소식도 두어해 전의 이맘때를 닮았다.
그러나 그 눈도, 찬바람도 잠에 겨워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의 표정과 같은 것.
사흘밤을 못넘긴 채 기세가 꺾여,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남녘의 강줄기 산자락을 거슬러 아지랑이 무리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있다.
동백에 숨결을 불어넣은 봄바람이 갯가의 버들강아지 위에 걸려 있다.
그 무엇보다, 봄이 정말 봄다워지는 것은 광양 백운산자락 섬진마을에 이르렀을 때다.
이곳에 한바탕 하얀 매화 꽃사태를 벌여 놓은 다음에야 봄은 봄으로서의 진정 의미있는 몸짓을 시작한다.
섬진강변 섬진마을로 향한다.
이즈음이면 언제나 즐거운, 익숙해서 더 여유로운 봄마중 길이다.
봄바람이 동백의 '이름을 불러' 꽃을 틔우게 한 것 처럼,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 서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길 기대하며 둘이 얼굴 마주하고 나서는 정다운 여정이다.
시골맛 푸근한 861번 지방도.
하동과 구례.광양,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는 듯 이어주는 섬진강을 따라 나 있는 길이 따뜻하다.
오른쪽 백운산자락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매화꽃 하얀색(15일께가 절정)으로 물들어 있다.
지나치면 놓칠세라 차를 세우고, 그 꽃밭에 들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기를 든 손이, 매화가지를 당기며 포즈를 취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주 예쁘다.
거기서 그냥 돌아가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매화밭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나 진짜 매화감상은 잠시 미룰 것.
청매실농원이 서너걸음 앞이다.
청매실농원은 섬진강 매화나들이의 중심.
축제한마당(31일까지)으로 시끌벅적한 청매실농원은 알려진대로 이지역 매화단지의 원조격 농원이다.
전국에서 매화나무 집단재배를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매화명인 홍쌍리씨의 열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처음 농원을 일구기 시작한 이는 홍씨의 시아버지 김오천씨.
일제시대 일본에서 광부생활을 하던 김씨가 돌아와,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으면서부터 시작됐다.
그게 80여년 전이다.
그 뒤 홍씨가 매화묘목을 늘리고 종자도 개량,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매화일가를 이루게 된 것.
푸른 기운이 도는 청매화, 붉은빛이 감도는 홍매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백매화 등 세가지 꽃을 모두 볼 수 있는게 이곳의 자랑.
카페트를 펼쳐 놓은 듯 파릇한 보리싹 위 어른 키 높이로 펼쳐진 매화밭이 환상적이다.
'매화는 운치가 있고 품격이 있어 고상하다'(강희안의 양화소록)는 말은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두 그루의 매화나무를 볼 때면 모를까, 셀수 없이 많은 매화나무에 핀 꽃이 바람을 받아 한꺼번에 흔들리는 모습을 마주하면 환장할 정도로 마음이 달뜨게 마련이다.
산책로도 잘 나 있다.
농원 사무실 양 옆으로 걷기 좋은 길이 놓여 있다.
오른쪽 길 초입이 전망포인트.
발 아래 파란색(보리싹)으로 무늬를 그려넣은 듯한 하얀색 매화 카펫이 펼쳐진다.
길을 더 올라 들어서게 되는 매화 터널도 좋다.
그 위에서 섬진강줄기를 향해 바라보는 맛을 어디에 비길까.
재래장독도 매화와 잘 어울린다.
사무실 앞 가지런한 장독이 봄볕의 따스함을 더해준다.
매화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은 고향마을의 정취를 한아름 안겨준다.
장독에는 매실이 익고 있다.
그 속에 된장, 장아찌 등 매실을 이용한 전통식품이 익는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매화삼매경에 취해 시간가는줄 몰랐던 반나절.
돌아오는 길가의 매화가 어느새 훨씬 더 많은 꽃부리를 틔운 것 같다.
광양=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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