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고,"누가 하늘을 보았다 말하는가"라고 외친 시인 신동엽(申東曄.1930~1969)은 죽은 지 서른 해가 넘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현재적 의미의 시인이다. 신동엽은 1970년대 이후의 참여 시인들에게는 한용운 임화를 비롯한 카프 계열의 시인들과 이육사의 맥을 잇는 하나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민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의 1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학비를 줄이려는 마음에서 관비가 지원되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그 무렵 기숙사에 있었다.그는 키가 작아 교실 앞자리에 앉았고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그에 비하면 나는 키가 큰 육상 선수에 외향적이었으므로 학교 시절 아주 썩 가까운 친구라고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기숙사와 교실을 오갈 때 옆구리에 세계문학 전집 같은 문학 서적을 끼고 다녔으며 우리는 서로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소설가 하근찬은 신동엽의 전주사범 시절을 전한다. 1948년 동맹 휴학 관계로 전주사범 기숙사에서 나와 귀향한 신동엽은 곧 부여 근처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지만 사흘 만에 그만둔다.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6·25가 일어나자 바로 귀향해 9월 말까지 부여에서 민청 선전부장으로 지내다 수복 뒤 국민방위군에 징집된다. 대학을 마친 뒤 제1차 공군 학도 간부 후보생에 지원해 합격하지만 발령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다 환도령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은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헌책방을 차린다. 이 시기에 신동엽은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열정은 이따금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킨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는데 내가 '타임'이나 '뉴스위크'와 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보아두었던 것 같았어요.자연히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목까지 여민 군인 잠바에 큰 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과 시가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농촌 경제학의 권위자로서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납북된 인정식(印貞植)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던 인병선의 말이다. 인병선은 그의 책방을 자주 찾았다. 두 사람은 이런 인연으로 1957년에 결혼한다. 결혼한 직후 그는 아내가 부여 읍내에 차린 양장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가다 간신히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1958년 말에 갑자기 각혈한 뒤 폐결핵인 줄 알고 학교에 사직서를 낸다. 서울 돈암동의 처가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홀로 부여에 남은 신동엽은 병과 가난 속에서 독서와 습작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그는 문명과 위선에 물든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한편 원초적인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노래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써서 1959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다. 이 작품이 입선돼 문단에 나온 신동엽은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세계일보에 '시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1960년 건강을 되찾은 신동엽은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셋방을 얻어 가족과 합류한 뒤 '교육평론사'에 들어간다. 4월혁명의 열기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교육평론사에서 '학생 혁명 시집'을 펴내며 문학 쪽에서 혁명에 동참한다. 1961년 그는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직장을 옮겨 숨질 때까지 8년 동안 교단에 선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