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내어 시작한 사업은 쉽지 않았다. 수표는 매일 되돌아오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장사도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았다. 1960년 2월.음력대목을 노린 김동수 회장은 한 차 가득 물건을 싣고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거래 상인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웠다. "물건을 이렇게 만들면 어떻게 팔아먹으라는 얘기요? 짐 풀 것도 없이 저쪽에 있는 재고나 다시 싣고 가시오.가뜩이나 스테인리스그릇 때문에 죽을 쑤는 판에…." 온 가족이 늘어가는 빚에 짓눌리는 시기였다. 은행 마감시간이 임박하면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돈을 구했다'는 반가운 전화와 '빨리 돈을 갚으라'는 사채업자의 전화에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김 회장은 "전화통을 잡고 '하루만 더 연기시켜 달라'고 통사정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말할 정도다. 판로부진과 스테인리스 식기의 등장,60년대초의 어수선한 정국 등으로 상황은 심각했다. 김 회장은 당시 직원들 월급이며 사채 이자 걱정에 사방으로 뛰어다니느라 구두는커녕 늘 운동화 차림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어요.'하나님! 회사의 빚과 저의 생명을 맞바꾸겠습니다.빚만 다 갚게 해 주신다면 기꺼이 저의 생명을 바치겠나이다'하며 울음을 삼켰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었던 김 회장은 다음날 눈을 뜨면서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고 말한다. 남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선물해주신 '덤'인 셈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도자기는 보수적인 자금운영을 통해 점차 회사의 부채를 줄여나간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직원들의 헌신도 김 회장에겐 큰 힘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73년,한국도자기는 그토록 골치를 썩이던 부채를 완전히 털어내게 된다. 김 회장은 "당시 2백여개가 넘던 사채 빚카드를 모두 정리하고 국민은행 상도동지점에서 1백만원이 예금된 보통예금 통장을 손에 쥐었을 때 아내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사업초기 빚으로 인해 겪었던 힘겨움은 이후 김 회장의 무차입경영원칙의 밑거름이 된다. 94년 착공,2000년에 완성한 한국도자기 신설동 사옥도 "은행빚 없이 순수한 영업이익만으로 짓겠다"는 그의 방침에 따라 6년만에 완공했다. 공사대금이 부족하면 공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 끝에 남의 돈 한푼을 빌리지 않고 완성한 탓이다. "은행빚은 일체 쓰지 않고 어음거래도 하지 않습니다.무리한 사업전개 대신 이익범위내에서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김 회장의 의지와 철학은 한국도자기가 지난 외환위기에도 흔들림없이 꾸준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남들은 바보같다고도 말하더군요.요즘 세상에 빚 안지고 사업하는 데가 어디 있냐고요.하지만 바위같이 거대한 기업보단 다이아몬드처럼 작지만 단단하고 빛나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