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다] 김동수 한국도자기 회장 (6.끝) 90년대 괄목할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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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목할 성장이룬 90년대 ]
지난 78년.
품질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김 회장(당시 사장)은 처음으로 국제 도자기 쇼에 출전할 결심을 한다.
바로 '78년 애틀랜타 국제도자기 쇼'였다.
일종의 도자기 올림픽으로 세계시장에서 한국도자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도자기 쇼의 개막식 때는 미국 유수의 일간지 기자들이 출품작을 채점해 즉석에서 심사결과를 발표하고 등수를 매기는 행사가 있었다.
'과연 우리제품이 몇 위나 할까?'하는 설렘과 흥분된 기분으로 김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결과를 본 김 회장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 해 2백여개사가 대회에 참가했는데 한국도자기가 랭킹 2백위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대통령 관저에도 들어간 물건인데…."
김 회장은 기가 막혔다.
"보름동안의 행사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그제껏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더군요."
김 회장은 당시의 심정을 참담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회장은 본차이나 제품의 질적 향상을 위해 전사 세계일류화 운동을 펼쳤다.
청주 본사의 중앙연구소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품질 개발에 몰두했다.
그 사이 전사지(轉寫紙)를 자체공급할 수 있는 '한국특수인쇄'라는 계열사도 뒀다.
또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생체무공해 위생식기'승인을 획득하기도 했다.
6년이 지난 84년 1월 미국 애틀랜타시.
같은 장소인 산업박물관에서 열린 '국제도자기 쇼'에서 한국도자기의 본차이나 제품은 참가한 4백20개사 제품중 품평순위 20위를 기록한다.
가격도 정당한 수출가를 매겼음에도 불구하고 계약고 결과 세계 1위로 집계됐다.
세계적인 권위지 '시카고트리뷴'지는 대회를 다룬 기사에서'도자기의 여왕,한국도자기'라는 제목을 사용한다.
이후 한국도자기는 오븐에도 사용할 수 있는 슈퍼스트롱 초강자기(젖소뼈 함유율 30%)를 93년에 개발,본차이나 보급형 제품으로 시장석권에 나선다.
91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월 1백만개의 그릇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공장을 설립해 해외 생산기지를 활용한 원가절감을 꾀한다.
95년엔 자체 해외수출 브랜드인 '세인트제임스'를 출시하고 잇따라 99년엔 뉴욕판매법인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98년 한국도자기(인도네시아 법인 포함)는 수출액과 전체매출이 각각 2백40억원과 8백20억원에 이를 만큼 성장하게 된다.
인수초만 하더라도 비가 새는 허술한 판자공장에서 빚에 쪼들리던 작은 도자기 제조사.
그러나 패배를 재도전으로 이어나간 김 회장은 한국도자기를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서도 인정받는 도자기 메이커로 성장시켰다.
김 회장은 "앞으로도 새로운 디자인 개발과 품질개발에 더욱 매진할 것"이라며 "향후 10년안엔 세계 1위의 도자기 명가로 발돋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