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임신으로 생긴 다섯쌍둥이로 한 번에 '오둥이' 부모가 된 김준영씨(31) 부부가 소회를 밝혀 이목이 쏠린다.22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씨는 처음 다섯쌍둥이를 확인한 날을 떠올리며 "아기집(임신 때 수정란을 둘러싸고 있는 조직·태낭)이 3~4개 보일 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5개가 보이니까 무게감이 달랐다. 사실 아기집 보고 첫 2주 동안은 우리 부부 둘 다 매일 울었다"고 밝혔다.경기 동두천 지역 고등학교 교사인 김씨와 경기 양주의 한 학교에서 교육 행정직으로 근무하는 사공혜란씨(30) 사이에서는 지난 20일 남자아이 3명과 여자아이 2명이 순서대로 태어나 화제가 됐다. 국내 다섯쌍둥이 출산 소식은 2021년 이후 3년 만이며, 자연임신으로 생긴 '오둥이'는 이번이 국내 최초다.사공씨가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진단받고 치료와 임신 준비를 위해 배란유도제를 맞았는데, 첫 치료 이후 바로 다섯쌍둥이가 생겼다. 김씨와 사공씨는 다른 대학 소속으로 연합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만났다. 2016년부터 7년간 교제해 지난해 10월 결혼식을 올렸다.이들 부부는 한 번에 다섯명의 아기가 생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신을 확인한 것은 뱃속 아기들이 5~6주 차쯤 됐을 무렵인 4월께였다. 김씨는 아기집 5개를 확인했을 당시 심정을 묻는 말에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교직에 있으니 아이들을 좋아하고, 자녀 계획을 세우는 데 영향이 있긴 했다"면서도 "자녀 한두명을 생각했었는데 다섯을 가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이어 "전공의 파업 때문에 병원 진료가 힘들다는 병원이 많아서 다섯쌍둥이를 돌볼 수 있는 병원을 빨리 찾아야 했다"며
자신에게 업무가 몰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산재를 입었다며 회사와 상급자를 상대로 2억6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직원이 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해당 직원은 근로복지공단에서 같은 사유로 업무상 재해 판단을 받은 것을 근거로 소송까지 냈지만 법원은 공단 판단과 달리 과도한 업무 부담은 없었다고 일축했다. 최근 공단이나 고용노동부에서 괴롭힘이나 산재를 인정 받으면 곧바로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민사 소송을 이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사담당자들은 가해자 외에 회사도 '사용자 책임'을 물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일 몰려서 극도의 스트레스"...2억6000만원 청구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최근 근로자 A씨가 B보험회사와 센터장 C를 대상으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A의 청구를 기각했다.2015년부터 B자동차보험사에 입사해 대구에서 근무해오던 A씨는 외제차 보상 업무를 담당하던 전임자가 2015년 말 퇴사하면서 대구 지역 사고조사·손해사정 업무를 이어 받게 됐다. 일을 맡은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이듬해 9월, A는 장기근속자가 쓸 수 있는 5일짜리 '장기근속 보상휴가'를 쓰겠다면서 휴가 신청을 냈다. 그런데 센터장 C는 "센터 실적이 떨어지고 있으니 (내년인) 2017년에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지만 A는 "업무가 과중하다"며 휴가 연기를 거절하고 9월 말경 제주도로 휴가를 갔다.이후 10월 A는 복귀했지만 업무 처리 지침이 변경되면서 업무 내용이 다소 바뀌었다. 바뀐 업무에 부담을 느낀 A는 복귀한지 두 달이 채 안돼 "휴가 신청을 미루라
'영원한 재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78세.장 원장은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담낭암 투병 중이던 고인은 발견 당시 4기였다. 입원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했으나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다.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후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접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은 일절 수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지난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재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1989년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해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이어 17·19·21대까지 총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한 바 있다.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