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맞는 절기이지만 무언지 더 간절히 그립고,도취하고픈 욕망이 드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길을 떠나고 싶고,꽃향기일 것이 분명한 봄내에 취해 조금은 게을러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봄은 여느 해 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내게 찾아왔다. 이 봄은 한 호흡도 늦추지 못할 정도의 긴장감과 불안감으로 참으로 낯선 모습을 하고 성큼 다가왔다. 어지러운 나날의 봄날들로 구성된 이 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미국-이라크간 전쟁이 발발했고,북한의 핵개발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전쟁 그 자체는 말할 것 없고,국제사회에서의 분쟁이 여전히 무력에 의해 해결되는 야만적인 방식이 엄존한다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래저래 평상심을 잃고,또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서 새삼스레 되돌아보게 된다. 돌아봄이야 그 어떤 가치 평가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런데 불현듯 '지난 날이 오늘보다 더 나았다'는 이상한 편향이 문제다. 예컨대 같은 전쟁도 10여년 전의 걸프전이 불확실성이 더 적었던 것 같고,또 무엇보다도 어딘지 목적한 곳으로 이르기 위한 절차에도 넉넉함이 조금은 더 많았던 듯하다. 하여튼 오늘이,지난 시절에 비해 더 조급해지고 또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종합적인 상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책상머리에서 골똘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물론 지난 사건들이 명료해 보이는 것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이치상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왜 항용 우리는 과거를 아름답게,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다 잊고 다소 윤색해서 바라보고는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만으로도 오늘에 대해 당당해지지 않는 것은 우리들 심성 깊은 곳에 '공포'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어떤 '불안' 같은 것이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자꾸 마음이 쓰여지기 때문이다. 흔히들 지레짐작이라고 하는 것,더 나빠지리라,더 상태가 악화되리라 예단하고 미리 우울해하는 것 말이다. 그러던 나는 나 자신과 같은 상황,또는 이런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곧 중국 대륙에서 황사도 불어올 텐데 어린 것들을 어떻게 거리로 내보내겠느냐는 학부모와,뛰는 석유값과 원자재 값에 한숨쉬는 제조업자들,승객이 점점 줄어들어 한숨만 내쉬는 택시기사들까지 울증(鬱症)에 사로잡힌 이웃이 한둘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저 당대(唐代)의,우뚝선 한 시인,두보를 떠올린다. 어두운 전란의 시절,일족은 뿔뿔이 흩어지고,채마밭에 채소가 드물지만 초당을 찾은 손님상에 올릴 나물을 뜯노라는 두보의 시편을 연이어 떠올렸다. 그리고 '강정(江亭)'의 저 유유자적함 속에 있는 마음의 작은 울렁임에 대해 숙고해 본다. '따스한 강 누정에 뻗고 누워/길게 읊조리며 들을 바라보는 때/물은 흘러가도 마음은 다투지 않고/구름 머무르니 이 마음도 느긋하지/적적하게 봄은 저물려 하고/ 흔흔히 만물은 스스로를 이루었다/고향 숲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근심 풀려고 억지로 시를 마름한다.'(심경호 옮김) 순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화두로 떠올리고 어지러운 오늘을 잠시만 잊기로 한다. 그럴 때 물이 흐르듯,구름이 머무르듯,인간 세상의 일이란 저마다 마땅히 돼야 할,가야 할 방향으로 흐르겠거니 하고 다소 억지로라도 생각해 본다. 두보는 '만물이 스스로를 이루었다'고 적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 아닌 문명의 병기들이 무수히 깔린 지뢰밭 같은 생에서 만물이 스스로 이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전 시위의 함성을 압도하는 포성이 숱한 목숨들을 산산이 흩어지게 했다는 중동발 뉴스가 귓전을 아프게 때릴 텐데. 그러나 봄날은,곧 가버릴 봄날은 내게 무심히 자연의 이치를 보여준다. 어리석은 인간의 사고 속에서도 이것 하나만은 어리석지 않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꽃은 피고,싹은 나뭇가지에서 피어나듯,저마다의 고운 숨결로 이 어지러운 봄날에 조화를 지향하는 더 큰 호흡을 일깨우리란 약속 말이다. suk@maumsan.com